독재자의 말로(7) -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 토도르 지프코프

김주원∙ 탈북자
20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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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말로(7) -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 토도르 지프코프 불가리아 공산당서기장이었던 공산독재자 토도르 지프코프.
Photo courtesy of Wikipedia

북녘 동포 여러분, 1990년대를 전후로 하여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공산국가들은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공산독재를 실시하다가 결국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 붕괴되었습니다. 루마니아, 유고슬로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등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붕괴와 함께 그 나라의 국가수반들이었던 공산독재자들도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죠.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불가리아 공산당서기장이었던 공산독재자 토도르 지프코프의 말로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가리아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이자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토도르 지프코프는 1954년부터 1989년까지 무려 35년간 장기 집권한 인물입니다.

1911 9월 불가리아 수도인 소피아의 인근교외마을인 프라베츠(Правец, Pravets)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토도르 지프코프는 집안이 너무도 가난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김일성보다 1살 나이가 많았던 토로르 지프코프의 가정형편을 보면 김일성의 할아버지 김보현이 농사꾼이었던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던 중퇴생에 불과한 것도 유사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토도르 지프코프는 구소련에서 레닌에 의해 1917 ‘10월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어 유럽지역으로 공산화가 확산되자 17살이 되던 1928년에 공산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하였습니다. 토도르 지프코프는 불가리아 공산당 초대 서기장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토도르 지프코프보다 나이가 30살 많았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1919년에 레닌에 의해 창설한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에 가입해 국제 공산화를 위해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불가리아 공산독재자 토도르 지프코프는 1932년에 불가리아 공산당 제2구위원회 비서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에는 나치 독일을 반대하는 저항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서 공산화가 촉진되자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던 초기에 토도르 지프코프는 당의 노선을 친소정책이라고 비난하던 동료인 코스 토프에 대해 관대하다는 비난을 받자 강경한 자세로 반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토도르 지프코프와 함께 근무했던 코스 토프는 반소련 노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출당되었고 중앙당위원회에서 해임되었으며 1949 6월에 체포되어 그해 12월에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판결은 같은 동료였던 토도르 지프코프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강경파 지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구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고 스탈린과 흐루시초프 등 소련 공산당 서기장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졌던 토도르 지프코프가 1954 3 4일에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당시 토도르 지프코프는 스탈린 지지파였던 불가리아 공산당 사무총장이었던 체르벤코프(Chervenkov)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는 공산당 서기장으로 발탁되면서 소련공산당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개인영웅주의 비판에 공조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지지를 이끌어 냈고 소련공산당의 지원과 성원으로 불가리아 공산당과 정부 내 자기의 세력을 강화해 나갔죠.

김일성이 1956 8수정주의를 척결한다는 미명하에종파숙청의 피바다를 몰아왔던 그 시기에 불가리아에서는 토도르 지프코프의 1인 지배체제가 확립되어 갔습니다. 지프코프는 자기의 측근이었던 불가리아 국가안보위원회 수장인 안톤 유고프(Anton Yugov)를 총리직으로 승진시켜 정치권력과 행정 권력을 거머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프코프는 1964년 소련공산당 제1비서인 흐루시초프가 자리에서 물러나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자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으로서 진압군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친소 노선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였습니다.

지프코프와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부의 지배적인 공산독재체제에 대한 반감은 서서히 확산되었고 1965년에는 이반 루니아 장군, 츄바트코 아네프 장군, 졸로 크라스테프 장군을 비롯한 고위 군장성들이 중심이 되었던 ‘4월 음모사건이라고 불리는 쿠데타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쿠데타 음모사건은 19653 28일부터 4 12일 사이에 대부분의 가담자들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죠. 그때부터 지프코프의 1인 독재는 더 강화되었고 1971 7월 국민투표를 통해지프코프 헌법이 채택되면서 그는 새로운 국무원 의장직을 거머쥐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1950년대 8월 종파숙청과 1967년 박금철 내각부수상 등 국내 갑산파들을 숙청하면서 자기의 입지를 더욱 든든하게 하였던 김일성의 숙청 행태와 너무도 일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에서 김일성을 수상님에서 수령님으로 바꾸고 당의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을 제정발표한 시점과 시기적으로도 일치하였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지프코프를 반대하는 국내외 여론과 불가리아 공산독재를 반대하는 반체제 인사들의 활동이 강화되면서 지프코프는 그들을 암살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1978년 불가리아의 반체제 인사인 게오르기 마르코프는 영국 런던에서 독극물인리신이 묻혀진 우산 끝에 찔려 독살되었습니다.

참고로 리신은 식물인 피마자의 열매에서 추출하는 독극물입니다. 북한에도 1960~1970년대 까지만 해도 피마자를 많이 심었다는 사실은 이 방송을 들으시는 청취자 분들 중에 50대 이상인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파마자 열매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에 독극물 리신이 들어있는데 열매 8개 분량의 리신은 성인 한명을 죽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전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일명 케이지비(KGB) 장군이었던 올렉 칼루진(Oleg Kalugin)에 의해 지프코프의 지시로 강행되었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암살자는 프란세스코 굴리노(Francesco Gullino)였다는 것이 알려졌죠.

지프코프는 불가리아 공산당 내부에서 자기에 대해 반기를 들려고 하는 대상들에 대해서도 가차없이 숙청하였습니다. 당시 체포, 출당, 숙청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를 들 수 있습니다.

토도르 지프코프는 자국 내에 이주한 타민족들에 대한 인권유린도 서슴없이 감행했습니다. 특히 불가리아에 살고 있는 터키인들에게 불가리아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했고 이를 반대하는 저항운동 참여자들이 희생되는 일도 발생했죠. 그 당시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지프코프의 반인륜행위를 반대하는 36명의 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숙청되기도 했습니다.

1989년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붕괴되면서 불가리아에서도 국민들의 공산독재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지프코프의 35년 동안의 1인 독재는 막을 내렸습니다. 1990 1월 지프코프는 공산독재로 불가리아 국민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부패와 전횡을 부리면서 나라를 소련의 괴뢰국가로 전락시킨 책임을 지고 체포되었으며 1992년 불가리아 법원은 그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 당시 지프코프의 나이는 81살이었습니다.

김일성은 1975 6월에 불가리아를 방문했고 1985 5월에는 지프코프가 북한을 방문해 두 공산독재자는 공산주의의 세계화를 공언하였지만 4년 뒤에 지프코프는 불가리아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독재자들의 말로는 인민의 준엄한 심판이라는 것은 역대 공산독재자들의 비참한 운명이 증명해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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