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우와 샤만호격침기념비

김주원∙ 탈북자
2017-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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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23일 6·25 전쟁 발발 66주년을 앞두고 북한 로동계급과 직맹원들의 성토모임이 미국 셔먼호격침기념비 앞에서 열리고 있다.
지난해 6월 23일 6·25 전쟁 발발 66주년을 앞두고 북한 로동계급과 직맹원들의 성토모임이 미국 셔먼호격침기념비 앞에서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시간에는 김정은의 고조할아버지인 김응우와 대동강기슭에 세워진 샤만(셔먼)호 격침기념비와 관련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북한을 봉건 왕조국가로 만든 김일성은 1960년대 말부터 당과 군, 사법기관을 개편해 자식들에게 대대손손 권력을 물려주는 영구세습 구도를 완성했습니다. 1974년 5월에 발표된 “당의 유일사상체제 확립의 10대 원칙”이 그 골간이었습니다.

‘10대 원칙’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은 호위사령부와 국가안전보위부(보위성), 당 역사연구소와 같이 북한에서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사설적인 조직들을 내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설조직들 외에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도 본격화됐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처음 왜곡된 인물은 김응우 였습니다. 김일성은 먼저 조상들의 이력부터 왜곡하며 영구세습을 위한 기반을 꾸준히 다져 왔습니다. 그 중에서 김일성의 증조할아버지였던 김응우는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날조됐습니다.

북한은 6월 17일자 노동신문에 “열렬한 애국자의 한생, 김응우 선생님의 탄생일을 맞으며”라는 제목의 장문의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신문은 내용을 통해 김응우가 마치 우리나라 애국운동의 대변자, 반미 성전의 선봉자였던 것처럼 선전했습니다. 특히 김응우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랐던 미국 선박 ‘샤만(셔먼)호’를 격침시키는데서 지도자적 역할을 했다고 각색해 김씨 일가를 조상대대로 애국적인 가정으로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김응우는 샤만호 사건 당시 남의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였습니다.

물론 산당지기라고 애국심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김일성은 생전에 내놓은 미완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증조할아버지는 남의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였으나 나라와 향토를 열렬히 사랑하는 분이였다”는 내용을 이미 서술했습니다. 김응우는 1845년 6월 17일에 평양시 중성리(현 중구역 중성동)에서 아버지 김송령과 어머니 라현직의 3남1녀 중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습니다. 올해 출생 172돌이 되는 김응우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의 집 소작농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 오던 김응우는 1860년부터 평양에 살고 있던 지주 리평택의 조상 묘를 봐주는 산당지기로 만경대에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김응우가 ‘샤만호’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자료는 그 어떤 역사책에도 없습니다. 북한은 1986년 9월 2일에 평양시 평천구역 해운 2동 대동강기슭에 샤만호 격침 120돌을 맞으며 화강석으로 “미 해적선 샤만호 격침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기념비에서도 북한은 샤만호 격침과 관련해 김응우를 적극 내세웠습니다.

기념비에는 “열렬한 애국자이신 김응우 선생을 비롯한 평양인민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던 미제침략선 샤만호를 천팔백륙십륙년 구월 이일 대동강 한사정 여울에서 격침하였다. 천구백팔십륙년 구월 이일”이라는 황당한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샤만호 기념비는 김씨 일가의 우상화를 위해 세워졌습니다. 북한은 1976년 이전까지 샤만호 사건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까지 북한은 우리 조상들이 남긴 역사 자료 그대로 샤만호 격침을 박춘권이 지휘했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러나 1968년 이후부터 샤만호와 관련된 박춘권의 이름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대신 그때까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던 김일성의 증조할아버지 김응우가 평양시 인민들을 불러 일으켜 샤만호를 수장하는데 앞장에 섰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이 김응우를 먼저 날조하게 된 데는 1967년에 있었던 갑산파 숙청사건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갑산파는 일제강점기에 북·중 국경인 함경도 일대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조직으로 그 중심에는 박금철과 이제순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1960년대부터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북한 인민들에게 강제 주입시켰는데 박금철 이효순을 비롯한 갑산파가 이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김일성은 눈에 가시 같던 갑산파를 1967년에 간첩, 종파분자로 몰아 모조리 숙청했습니다. 갑산파 사건으로 김일성이 깨달은 것은 개인숭배가 단순한 억지 주장에 그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그럴듯한 이론과 배경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다급히 서두른 것이 김일성 일가와 조상들을 애국지도자로 내세우는 작업이었습니다.

당시 노동당 중앙위 선전선동부를 책임지고 있던 김정일은 제 아버지인 김일성 일가를 신격화하면서 기존에 제대로 보존되었던 역사자료들을 모조리 없애버렸습니다. 지어 도서관들과 가정집들을 일일이 돌며 도서들을 회수했습니다. 갑산파 숙청사건을 계기로 김정일은 김일성의 생일인 1967년 4월 15일 ‘4.15 문학창작단’을 발족시켰고 김응우는 물론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 강반석과 동생 김철주, 삼촌 김형권을 모두 항일 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된 것으로 조작했습니다.

‘샤만호 격침기념비'는 1985년에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사건이 있은 지 120년이 지난 1986년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샤만호 격침의 진실을 밝힌 ’고종실록‘과 ‘패강록’, ‘평양지’에서는 김응우와 관련된 내용을 전혀 찿을 수 없습니다. 북한은 김응우가 만경대의 인민들을 불러 일으켜 샤만호를 격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하지만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샤만호 침몰에 공을 세웠다고 조정에 올린 27명의 명단에도 김응우라는 이름은 없었습니다.

샤만호 선주는 중국 천진에 있던 미국인 무역상 프레스톤이고 선장은 단마르크인 페이지였습니다. 이 배에는 선원장으로 미국인 윌슨이, 선원들로는 중국과 말레이시아인 24명이었고 통역으로는 우리말을 잘 아는 영국인선교사 토머스가 승선했습니다. 1866년 8월15일 샤만호는 장마로 불어난 대동강을 거슬러 만경대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배에는 서양에서 만든 유리그릇과 천리경 등 잡화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샤만호는 서양에서 만든 물건들을 동양에 팔아 무역을 하는 배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 조정은 프랑스 해군의 간섭에 긴장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시기에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샤만호가 올라오면서 평양의 관리들을 크게 놀라게 했습니다. 평안도 감찰사 박규수는 사람을 보내 샤만호의 목적을 물었습니다. 통역관이었던 선교사인 토머스는 선원들의 국적을 솔직히 밝히고 샤만호가 조선과 무역하려고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쌀과 금, 인삼, 가죽 등을 서양물건들과 바꾸려 한다며 배에 실린 화물을 소개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시의 기록들을 살피면 샤만호는 승조원들이 만경대에 상륙하여 지형을 정찰하는 등 이상 행동도 있었습니다. 당시 쇄국정책에 매달려온 고종은 서양과의 교류가 불순한 영향을 미친다며 교역을 금지시키고 샤만호에 돌아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의 지휘아래 군인들과 인민들이 장작에 불을 지른 작은 배들을 띄워 보내 샤만호에 부딪혀 불이 옮겨 붙도록 하는 방법으로 배를 완전히 수장시켰습니다. 선원들도 모두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때로부터 5년이 지난 1871년에 샤만호 사건을 빌미로 군함 5척, 85문의 포와 해군 1,230명을 실은 미군이 7월 19일 남양만에 도착했고 이것이 역사에 잘 알려진 신미양요입니다. 저들의 영구집권을 위해 조상도 역사도 멋대로 날조하는 자들, 김씨 일가의 왜곡에서 벗어나 샤만호의 진실을 찾는 그 날이 북한이 번영하는 날로 될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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