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당 책임비서들의 숨겨진 생활

김주원∙ 탈북자
201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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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동아시안컵 경기에서 우승한 여자축구 선수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보고 있다. 이들은 우승 후 북한 당국으로부터 '노력영웅' '인민체육인' 등의 각종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칭호를 받은 선수들은 고급 자가용과 아파트 제공, 연금 지급 등 다양한 혜택을 통해 중앙기관 고위 간부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5 동아시안컵 경기에서 우승한 여자축구 선수들이 고급 승용차를 타보고 있다. 이들은 우승 후 북한 당국으로부터 '노력영웅' '인민체육인' 등의 각종 칭호를 받았다. 이러한 칭호를 받은 선수들은 고급 자가용과 아파트 제공, 연금 지급 등 다양한 혜택을 통해 중앙기관 고위 간부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청취자여러분, 저는 2009년에 북한을 탈출해 현재 7년차 대한민국 서울에서 살고 있는 탈북민 김주원입니다. 최근 북한의 고위간부와 외교관들이 잇달아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김정은 체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한층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가까이에서 봐왔던 북한의 고위층들, 도당책임비서들의 숨겨진 생활상에 대하여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북한의 행정 구역은 크게 도, 특별시, 직할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도에는 노동당 지방조직인 도당위원회가 있습니다.

노동당 부장급에 해당되는 도당책임비서의 권한은 대단합니다. 저는 1970년대 말 양강도 도당책임비서였던 림수만의 아들 림호성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엔 양강도 간부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양강도 당위원회 책임비서의 아들인 림호성은 교직원들이 상당히 도와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겨우 중간정도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도당책임비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시험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졸업하던 1980년 다른 동창생 9명과 북한의 최고 대학으로 알려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입학시험을 보았습니다. 시험을 본 9명중에 합격자는 4명 이었는데 저를 제외하면 모두 양강도에서 한다하는 간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나머지 합격자들은 도당 책임비서의 아들 림호성과 시당 책임비서의 아들 백경일, 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의 아들 주성철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같이 시험성적이 매우 낮았으나 모두 특별대상자(특별전형)로 입학이 허용됐습니다.

양강도당 책임비서 림수만의 아들 림호성은 워낙 실력이 낮은데다 자연과학에 자신이 없어 역사학부에서 공부했습니다. 간부의 자식들을 제외하고 순수 실력 하나만으로 입학한 학생은 대학교수의 아들이었던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고 해도 단숨에 간부로 배치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러나 실력이 높지 않았던 림호성은 도당책임비서라는 아버지의 직책에 힘입어 쉽게 중앙당 지도원으로 배치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갓 대학을 졸업했을 때까지만 해도 중앙당에 배치된 림호성이 너무도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러움은 어느 사이엔가 부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그것은 고위간부였던 대학동창들의 부모들이 숙청되거나 처형되는 사건들 때문이었습니다.

저의 김일성종합대학 같은 학급 동창 중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 총장이며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인 박영철의 딸인 박향순과 조선중앙은행 총재 변승우의 딸인 변혜경이 함께 공부를 했는데 그들은 부모와 함께 온 가족이 지방으로 추방됐습니다.

양강도 당 책임비서였던 림수만의 딸은 남편이 소련 유학생으로 인민무력부작전국에 배치됐습니다. 하지만 1992년 6월 인민무력부에서 있은 ‘푸른제명칭 군사학교’ 사건에 연루돼 처형됐고 어린 자식마저 빼앗기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사위가 처형된 사건으로 하여 임수만도 양강도 당 책임비서에서 해임 철직됐지만 다행히 아들 림호성이 김정일의 측근으로 중앙당에 든든히 버티고 있었던 덕에 김정일로부터 용서를 받고 개성 시 당위원회 책임비서자리에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1997년에 망명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한 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였던 황장엽 선생은 2004년 탈북자들의 송년모임에서 “김정일 곁에서 일할 땐 늘 고압선 밑에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고 했는데 북한 고위층들의 심중이 잘 반영된 표현이었습니다.

림수만을 비롯해 저의 고향인 양강도에서 도당책임비서들의 수난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고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책임비서 김원전도 하루아침에 가족들과 함께 함경북도 연사군 임산사업소 노동자로 추방됐습니다.

1929년생인 그는 지방 간부로 출발해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까지 거치며 북한에서 체계적으로 양성된 당 일꾼이었습니다. 그가 철직되게 된 원인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삼지연 특각에 왔을 때 미리 와서 대기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은 어디가나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로 지옥을 방불케 했습니다. 김정일 정권은 극심한 경제난을 해소하려고 2002년 7월 1일에 새로운 ‘경제관리개선조치’라는 걸 내놓았습니다.

‘7월1일 경제개선조치’가 나온 지 5달이 지난 그해 12월 김정일은 양강도 도당책임비서 적임자로 중앙당 조직부 김경호 부부장을 지명하여 파견하였습니다. 김경호는 연형묵 자강도 도당책임비서가 추천한 인물이었습니다.

김정일이 양강도를 중시하면서 도당책임비서 선택을 심사숙고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양강도는 우선 백두산이 위치해 있고 보천보와 대홍단 전적지, 수많은 사적지들이 있어 북한에서 혁명전통의 관문도시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 양강도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중국의 자본주의식 개혁개방에 주민들이 노출돼 있었습니다. 김정일이 ‘황색바람’, ‘자본주의 날리리풍’이라고 경계를 하던 외부세계의 정보도 초기 양강도를 통해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사상의 모기장을 든든히 치고 자본주의 문화 유입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김정일의 1993년도 지시도 사실상 양강도의 젊은 청년층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김정일은 늘 중국과 인접해 있는 양강도 당 조직의 역할을 강조해왔습니다.

양강도는 국경선인 압록강의 폭이 좁아 일반인들도 쉽게 밀수를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양강도 소재지인 혜산시를 ‘황색바람’의 통로라고 낙인찍는가 하면 ‘혜산농림대학’을 밀수대학이라고 개탄할 정도였습니다.

혜산 시는 전국의 달리기 장사꾼들이 밀려들어 중국으로부터 밀수한 물건을 도매 하는 상업도시로 변하고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 알판(DVD)들이 북한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도시로 김일성, 김정일의 권력을 위협했습니다.

김경호 책임비서는 9형제 중 맏아들이었는데 막냇동생은 형의 권세를 믿고 남강 무역회사에 이름을 걸고 혜산에 내려와서 금을 밀반입하는 장사를 하였으며 시집을 간 딸들은 강계 시에서 혜산에 내려와 뇌물을 챙겨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벽시계와 식료품을 비롯해 중국과의 각종 무역교류에 종사하던 저는 매일이다시피 검찰이나 보위부의 검열과 뇌물요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런 통제를 피하기 위해 저는 도당책임비서 운전수인 송철을 내세워 책임비서의 부인에게 접근 하였습니다.

김경호 도당책임비서의 부인은 뇌물을 받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대상을 잘 골라 냈습니다. 하도 뇌물을 많이 받다 나니 어떤 날에는 몰래 뇌물을 들고 온 사람들이 역시 뇌물을 바치러 온 잘 아는 간부와 마주쳐 난처해질 때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이후 2013년 3월에 김경호 책임비서는 조직비서로 내려먹고 그 후임으로 경공업부부장이던 김히택이 내려왔습니다. 김히택은 중앙당 경공업부장이었던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가 추천했습니다.

장성택이 처형된 2013년 12월 양강도 당위원회 책임비서였던 김히택도 물갈이 됐습니다. 도당 책임비서 후임인 리상원은 2007년부터 양강도당 책임비서였다가 개성시당 책임비서로 내려앉은 림수만의 자리를 지켜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단순히 양강도 뿐이 아닙니다. 북한의 도당책임비서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양강도당 책임비서들과 꼭 같은 치욕의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도당책임비서들 만이 아닌 북한의 모든 고위층이 안고 살아야 할 비극적인 운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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