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관현악단 (2)

김주원· 탈북자
201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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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제37차 '윤이상음악회'.
지난해 10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제37차 '윤이상음악회'.
사진-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윤이상 작곡가는 일본과 독일 등 외국에 유학을 가서 음악을 전공한 세계적인 작곡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대남전략의 표적이 되어 북한을 비법적으로 방문하였던 것이 그들에게는 일생을 망치는 일로 되었습니다.

1963년 4월에 부인 이수자 씨와 함께 북한을 방문하였던 윤이상 작곡가는 북한 당국의 보여주기 식의 관광일정에 따라 평양과 지방도시들을 방문하면서 북한에 매료되었습니다. 방북 이후 그가 북한에 대하여 “김일성의 영도로 북한주민들은 굶주림에서 해방되었으며 추위에 떨지 않게 오두막이 아닌 기와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말한 것만 봐도 북한 당국이 윤이상 작곡가를 세뇌시키기 위해 얼마나 거짓 선전을 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995년에 사망한 그가 1990년대 중반에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으로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는 자기를 속인 북한 당국에 분노했을 것입니다.

윤이상 작곡가는 1969년에 남한에서 추방되어 그때로부터 대한민국 입국이 거절되어 사망한 1995년까지 26년 동안 단 한번도 남한 땅을 밟을 수 없었습니다. 1967년 북한 간첩단사건인 동백림사건을 계기로 그의 음악은 순수 예술의 비정치성을 버리고 정치적인 면이 부각됩니다. 이에 대해 본인도 “나의 예술적인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나는 정치적으로 각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말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1971년에 서독 국적을 취득한 윤이상 작곡가는 같은 베를린예술협회 동료회원인 서독 작가 루이제 린저를 알게 되고 북한을 자주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그녀로부터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합니다. 1974년에 일본에서 윤이상 부부는 동백림사건에 대해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하였고 당시 납치되었던 김대중 구명운동도 적극 동참하였습니다. 1977년 8월에 남한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하는 해외단체인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한민련)이 결성되었고 윤이상 작곡가는 유럽본부 의장을 맡았습니다. 음악가인 그가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일성과 여러 차례 접견하여 기념촬영도 하였던 독일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를 잘 알고 계실거라고 봅니다. 루이제 린저가 1977년에 윤이상 작곡가와의 대담 내용을 바탕으로 쓴 소설 ‘상처받은 용'을 보면 남한정부에서 배척받고 점차 작품의 정치적 면을 강조하기 시작한 윤이상 작곡가의 심리적인 변화과정을 잘 알 수 있습니다.

1980년 5월에 대한민국 광주에서 5.18민주항쟁이 일어나자 윤이상 작곡가는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하여 서독 라디오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로 독일 쾰른에서 공연하였습니다. 이후 북한 당국은 윤이상 작곡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고 김정일의 지시로 김일성의 생일 70돌을 맞던 1982년부터 북한에서는 ‘윤이상음악회’가 열리게 됩니다. 1984년에는 윤이상 음악을 연구하고 그의 음악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1982년 여름, 윤이상 부부와 아들은 북한을 방북하였는데 북한 당국은 그의 아들인 윤우경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던 아들이 어릴 적에 촬영가가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안 북한 당국은 그를 평양영화연극대학 촬영학부에서 공부하도록 하였고 김정일의 지시로 그의 신부감도 마련해주었습니다. 김정일은 윤이상 작곡가의 며느리감을 예술계에서 찾아보라고 하여 함흥이 고향인 피바다가극단의 무용배우가 선정되었습니다. 당시 김정일도 자기보다 5살이나 나이가 위인 배우 성혜림과 동거하던 시기였습니다.

며느리도 북한 여성을 선정하게 한 것은 북한 당국이 윤이상 작곡가를 자기들에게 영원히 매어 놓으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윤이상 작곡가는 1987년에 음악을 통한 남북교류를 성사시키려 한다며 남북합동음악회를 추진하기도 하였고 1990년에는 평양에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성사시키기도 했습니다. 윤이상 작곡가의 노력을 축하하는 차원에서 북한 당국은 그의 생일 75돌을 기념하는 기념음악회를 평양에서 열도록 해주었습니다.

1992년 김일성의 생일 80돌, 김정일의 생일 50돌을 맞으며 평양시 영광거리에는 윤이상음악당이 완공되어 윤이상음악연구소는 음악당 내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평양시 중심구역의 김책공업종합대학의 도로 맞은편에 건설된 15층 건물의 윤이상 음악당에는 300석 규모의 연주홀과 연습실, 휴게실, 국제회의실, 강의실, 녹음실, 자료실 등 음악활동에 필요한 2백여 개의 방이 있습니다. 윤이상음악당은 김정일의 지시로 1991년 3월에 착공되어 1년 7개월만인 1992년 10월에 개관을 하였습니다. 개관을 기념하여 19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4일까지 윤이상 음악회와 사진전시회가 열렸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이곳에서 ‘윤이상 음악회’가 개최되고 있습니다. ‘윤이상 음악회’는 윤이상의 작품과 통일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주로 연주되며 윤이상 음악연구토론회 외에도 통일음악을 주제로 한 세미나도 열리고 있습니다.

윤이상음악연구소는 설립 초기에는 윤이상 작곡가의 음악활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의 대남정책을 위한 사업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연구소에서는 외국음악과 한국음악에 관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분석하고 있으며 남한음악가들의 성향, 남북음악교류를 위한 기획과 전략 등도 연구조사되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윤이상음악연구소의 연구성과들이 축적되어가자 이를 연주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0년 12월에 윤이상관현악단을 창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윤이상음악연구소의 연구논문들을 실은 잡지인 ‘음악연구’가 정기적으로 출간되었고 ‘윤이상 음악토론회’와 ‘윤이상 음악제’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윤이상관현악단은 다양한 형식의 합동공연을 통하여 음악연주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음악 분야의 남북교류와 해외 교류의 창구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윤이상음악당 건축설계를 위해 건축가들을 서독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서독에 살고 있던 윤이상 작곡가의 자택에 찾아가 김정일의 배려로 윤이상음악당이 건설되게 되는데 건축설계형식을 토론하기 위해 서독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윤이상 작곡가는 자기의 이름을 단 음악당이 건설된다는 말에 흥분하였고 그들을 데리고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등 여러 음악연주장들을 관람시켰고 그 중에서 베를린에 있는 필하모니의 실내 연주장 제일 마음에 들어 건축도면을 구하여 지금의 윤이상음악당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1994년 새해 설맞이 공연을 맞으며 윤이상 작곡가 부부를 북한에 초청하였습니다. 1993년 12월 31일 공연시작 전에 대기실에서 김일성과 윤이상 작곡가는 상봉하였는데 그때 김일성은 당시 당뇨병을 비롯한 여러 지병으로 앓고 있는 그에게 “왜 이제야 왔냐”며 “윤이상 선생같은 분은 오래 살아야 하오. 민족의 예술성을 세계에 널리 선양하는 이런 분은 민족의 재간둥이요”라고 극찬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그에게 “이제는 나이도 많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외국에서 너무 고생하지 말고 독일에는 한번씩 얼굴만 내밀고 공기 맑은 조국에서 편히 지내도록 하라”며 평양 교외에 그들이 살 집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김일성은 1994년 설맞이 공연 때에 윤이상 작곡가를 만나고 그해 7월에 사망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윤이상 작곡가에 대한 평가는 “조국통일 위업에 커다란 공적을 쌓아 올렸고 그 실현을 위해 활동하는 애국지사”라고 한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995년 11월 윤이상 작곡가는 노환과 오랜 지병으로 78세의 나이로 서독 슈판다우 의 한 병원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음악창작을 위해 강서고분을 구경하려고 북한에 갔다가 북한 당국의 세뇌선전과 계략에 빠졌던 윤이상 작곡가는 오랫동안 북한당국의 예술정치의 희생양으로 살다가 사망되어서야 그 영혼만이 남해 바닷가, 어린 시절에 뛰놀던 통영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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