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김영주

김주원∙ 탈북자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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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19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96)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고령의 몸을 이끌고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투표에 참가했다.
지난해 7월 19일 북한 김일성 주석의 동생 김영주(96)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고령의 몸을 이끌고 지방의회 대의원 선거 투표에 참가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11월 25일에 김일성과의 친분관계가 깊었던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90살을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1963년 37살의 나이에 정권을 장악한 피델 카스트로는 45년 동안 쿠바를 통치해왔습니다. 피델 카스트로는 82살이 되던 2008년에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넘겨주었습니다. 피델 카스트로의 생애와 관련해 많은 평가들이 있지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그가 쿠바 인민들의 머리 위에 군림한 독재자였다는 것입니다. 부정부패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쿠바의 바티스타 독재체제를 뒤집고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만 바꾼 것이 카스트로의 독재체제였습니다. 독재자란 주변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고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집권자를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의 독재는 김일성과 전혀 달랐습니다. 쿠바에는 피델 카스트로의 동상이나 우상화물이 전혀 없습니다. 피델의 이름을 딴 어떤 건물이나 상징적인 장소도 없습니다. 그는 6남 2녀를 두었지만 권력을 세습하지 않았습니다. 생전에 권력을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겼지만 이를 두고 권력세습이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이미 쿠바의 국방장관이었고 쿠바 공산당 위원, 국가평의회 부위원장으로 당연히 권력의 2인자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의 후계자 문제를 놓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동생이었던 김영주가 물망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동생인 김영주를 제일 먼저 모스크바종합대학에 특혜로 유학 보냈습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모스크바 고급당학교’를 다녔습니다. 소련에서 유학을 마친 김영주는 1954년에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취직했습니다. 김일성의 후광을 입고 김영주는 1960년 9월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이후 1966년 10월에는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 겸 비서국 비서로, 1969년 12월에는 정치국위원으로 승승장구하면서 김일성의 다음가는 권력자로 거침없이 권력을 장악해 나갔습니다. 그때까지 김정일은 철부지 어린애에 불과했습니다. 김영주는 김일성의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였고 김일성종합대학을 갓 졸업한 조카 김정일에게는 당 사업을 배울 수 있는 정치적 스승이었습니다. 당시까지 김영주는 북한에서 진행되는 각종 공식적인 행사들에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김일성과 체격과 얼굴마저 빼어 닮은 김영주는 북한 인민들속에서 상당한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김영주는 1972년 7월에 남북공동위원장으로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협조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이렇게 당당하던 김영주가 뜻밖의 암초에 부딪힌 것은 김일성의 후계자 지정 문제가 시작되면서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성애를 주축으로 하는 김평일 지지파와 빨치산 출신들을 한 축으로 하는 김정일 지지파, 그리고 국내민족주의 운동가 출신들로 구성된 김영주 지지파가 암투를 벌렸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1960년대 말 노동당에 발을 들이 민 김정일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삼촌 김영주와 배다른 동생 김평일을 견제하기 위해 노동당 선전선동부를 장악하고 김일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아첨을 다 떨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선전선동부 산하에 김일성의 생일을 딴 ‘4.15 창작단’을 조직하고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4대 가극과 4대 연극을 만들어 냈고 4대 가극 중 ‘피바다’와 ‘꽃 파는 처녀’를 영화로도 만들어냈습니다.

1974년에 김정일은 ‘당 사상사업에서 제기되는 몆 가지 문제에 대하여’ 라는 노작을 발표하면서 당시 모스크바 종합대학 철학부를 졸업한 황장엽 선생이 내놓은 ‘인간 중심의 철학’을 ‘주체사상’으로 포장해 김일성의 사상으로 합리화했습니다. 또 김일성의 장기집권과 권력세습의 발판이 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제정해 북한의 합법적인 헌법을 무력화시켰습니다. 독재자의 발판을 마련한 김일성은 그 공로를 인정해 김정일을 노동당 선전선동부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이 과정에 김정일은 김일성의 빨치산 출신들과 힘을 합쳐 김성애를 주축으로 한 김평일의 지지 세력들을 혁명전통의 곁가지라고 모함해 권력계에서 처절하게 몰아냈습니다. 김일성의 2인자였던 김영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김정일은 빨치산 출신들을 동원해 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후계자 문제를 제기하게 했습니다. 김일성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친동생인 김영주와 아들인 김정일 사이에서 상당히 고민을 하면서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음씨 여렸던 김영주는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장으로 김일성의 2인자였기에 후계자 자리도 응당 자신에게 차례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김정일을 너무 방치해 두었습니다. 1970년대는 북한의 경제가 급속히 하락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빨치산 출신들과 모의한 김정일 일당은 북한 경제가 부진한 책임이 김일성에게 있는데도 모든 책임을 김영주에게 넘겨씌웠습니다. 한편으로 김정일은 ‘속도전’과 ‘자력갱생’이라는 구호를 내놓고 북한의 경제에 일시적인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김정일의 놀라운 권모술수는 특출한 수완가를 자처하던 김일성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김일성은 빨치산 출신들의 거듭되는 추천에 못이기는 척 하면서 동생보다 친자식인 김정일에게 권력을 넘겨주려는 움직임을 노골화 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빨치산 출신들과 김정일 일당이 북한의 경제부진을 김영주에게 전가한 기회를 틈타 동생에게 기회를 준다며 1974년 2월 김영주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에서 해임해 정무원 총리라는 다시 헤어날 수 없는 함정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노동당의 권력중심에서 밀려나 하루아침에 행정 간부로 하락한 김영주는 김정일과 빨치산 세력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건강상의 문제를 구실로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이후 자강도에 내려가 평생 형인 김일성과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던 김영주의 딸 김영성과 아들 김정현도 퇴학하여 부모들을 따라 자강도로 내려갔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죽기 1년 전에야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김영주를 부주석 겸 정치국위원으로 복귀시켰습니다. 그러나 김영주는 자강도에 은거하면서 평양으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부주석과 정치국위원이라는 한갓 허울만 쓰고 비굴하게 김일성의 품게 기어드는 수치가 싫었기 때문이라는 판단이 당시의 간부들속에서 지배적이었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삼촌인 김영주에게 대의원이라는 형식적인 권한만 주었습니다. 김영주는 북한의 선전매체 그 어디에도 등장한 적이 없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북한의 인민들은 김영주라는 존재에 대해 기억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김영주가 김정일이 사망한 후 권력을 잡은 김정은 정권에서 갑자기 얼굴이 내비쳐지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장례식에도 김정일의 장례식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던 김영주였기에 북한의 인민들속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았다고 합니다.

김영주가 북한의 텔레비전(TV)에 등장한 것은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처형한 뒤인 2015년 7월 19일 지방 대의원 선거였습니다. 김정은은 김영주가 선거에서 한표를 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권력세습을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그 시각 김영주는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김일성에 의해 무너져 내린 북한, 김정일과 김정은이 무참하게 짓밟은 북한의 인민들에게 한없이 죄를 지은 참담한 한 표, 자신의 혈통이기도 한 김일성 일가에 영원한 저주가 내리라고 분노의 한을 담아 한 표를 던지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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