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많은 인물들과 지역, 사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 내용의 깊이를 파고들수록 우상화 선전을 위해 허구와 날조로 엮어놓은 가짜 역사 도서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6장 ‘시련의 해’, 7절 ‘소사하 가을’과 8절 ‘라자구 등판에서’를 읽다보면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이 사망하면서 남겨진 김일성의 형제들, 특히 당시 12살이었던 막냇동생 김영주에 대해 ‘그가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았을까’, 해방 전과 해방 후, 그리고 노년에 그의 삶이 궁금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일성의 막냇동생인 김영주의 생애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6장 7절 ‘소사하의 가을’에는 김일성이 모친 강반석이 사망한 소사하 집에 가서 동생들과 상봉하던 장면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두 동생을 데리고 살고 있던 모친을 만나러 차광수가 마련해준 첩약을 가지고 그곳에 갔으나 이미 모친은 사망한 상태였고 철주 동생은 “형. 왜 인제야 오우?”라고 말하며 엉엉 울었으며 영주 동생은 돌덩어리처럼 난데없이 날아들어 자기의 왼쪽 옆구리에 매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때로부터 나는 두 동생의 보호자가 되고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혁명은 나로 하여금 가장의 구실도 보호자의 역할도 할 수 없게 하였다. 어린 동생들을 두고 거치른 북만땅을 향해 기약도 없이 떠나가는 내 마음은 가볍지 못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리고 두 동생과 헤어진 이후 철주 동생의 사망과 막냇동생 김영주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1935년 6월 철주 동생이 처창즈 근방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의지가지 할 데 없었던 막냇동생은 고아가 되어 남의 집에서 아기보개도 하고 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었다고 합니다. 고아신세가 된 막냇동생 김영주는 중국 동북3성 지역은 물론 도회지나 농촌들에도 들락날락하며정처없는 유량생활을 하였고 중국 요녕성 심양에서 당시 맥주공장 노동일을 하기도 했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면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모르는 김영주의 숨겨진 과거사에 대해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보다 8살 아래, 1920년 9월 21일에 출생한 김영주는 김일성이 태어난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가 아니라 부모들이 일제경찰에 피해 다니면서 살았던 타지방들인 중강이나 림강 등지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중국 동북지방에, 일제에 의해 1932년에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이 건국되자 이 지역의 학교들에서도 일본어로 교육이 진행되었고 당시 12살이었던 김영주는 일본이 강요하는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어를 잘하던 김영주가 일본 관동군 독립혼성 82여단에서 통역관으로 복무하였다는 사실은 중국 국민당 군대인 국민혁명군 193사단에서 대위로 복무하였던 이용상의 회상으로 알려졌습니다.
1945년 만주국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건국 13년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중국의 동북3성 지역을 포괄하였던 만주국은 일본이 내세운,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한 부의가 마지막 국가 원수였고 당시 만주국의 행정관료들은 일본인과 조선인들로 구성되었으며 한족은 공직에서 철저히 배격되었습니다.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치안은 관동군이 맡았습니다. 관동군은 일본제국 육군소속 부대였으며 일제는 이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대거 입대시켰습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관동군도 무장해제 당하게 되는데 당시 일본 관동군에서 통역관으로 복무하던 김일성의 막냇동생 김영주도 무장해제 당하면서 중국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던 이용상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때부터 이용상과 김영주는 일정한 기간 함께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인해 훗날 김영주의 과거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장해제를 당하던 당시 이용상은 김영주를 따로 불러 ‘나도 조선인이다’고 말하자 김영주는 조선말로 대화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어린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맏형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집을 나섰지만 일제토벌이 무서워 러시아로 도망갔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이후로는 감감무소식이고 혼자 남은 자신의 처지를 말하는 그가 가엽게 여겨져 이용상은 그를 서울에 데리고 나가 한동안 함께 지냈습니다.
해방 후 서울에서 살던 김영주는 어느 날 형 김일성이 북한으로 돌아와 평양에서 연설하는 것을 라디오로 듣고 “우리 형님”이라며 이용상에게 함께 월북할 것을 제안했으나 이용상이 거절하자 혼자 월북하여 김일성과 재회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일본군이나 마찬가지였던 관동군 김영주와 그 관동군의 토벌이 무서워 러시아로 도주해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북한으로 돌아온 두 형제의 상봉은 한때는 적으로 대치했던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상봉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김일성은 동생 김영주의 친일파 경력 즉 관동군 군인으로 복무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철저한 통제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주민들은 김영주가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던 사실을 지금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관동군 군인출신으로 친일파와 같이 숙청되어야 마땅하였지만 김일성의 후광으로 김영주는 해방 후 소련 유학을 가게 되었고 모스크바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으며 32살이 되던 1952년에는 모스크바 고급당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1년이 지난 1953년 3월에 귀국하였습니다. 북한으로 귀국한 김영주는 소좌계급을 받고 총정치국 제7부 지도원으로 배치됐으며 군법재판소 사법행정서기관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1년 후인 1954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직부 지도원으로 발령받아 중앙당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고 1957년에는 과장, 부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중앙당 조직부에서 근무하면서 소련유학파들을 대거 간부로 등용한 김영주는 점차 소련 유학파 대부격으로 등장하였고 1958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면서 노동당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내파, 일명 갑산파의 허봉학, 김창봉 등이 김영주의 관동군 복무경력을 두고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라며 조직지도부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발하자 김일성은 1967년 갑산파 숙청 사건을 통해 박금철과 리효순 등 갑산파를 쓸어버렸고 1969년에는 허봉학, 김창봉을 극좌 좌경 맹동주의자로 몰아서 숙청하였습니다.
1969년 12월, 4기 20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한 김영주는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 겸 조직비서로 재선출되었고 당대회 마지막날 당규약 개정보고를 하면서 북한에서 김일성의 다음가는 2인자로 부각되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는 1972년 7월 4일, 7.4공동성명에서 대한민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당시 노동당 조직비서인 김영주가 서로 서명한 문서를 봐도 당시 김영주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하면서 권좌에서 밀리기 시작한 김영주는 김일성이 급사하자 장의위원으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쳤고 김정일 사망 후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95살의 나이에 지방대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모습을 끝으로 더 이상 언론매체들에 공개되지 않았으며 101살 되던 2021년 12월 13일에 노환으로 사망했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도 공개하지 못한 동생 김영주의 친일파 행적을 감추고 김씨 일가를 혁명가정으로 둔갑한 북한 선전선동의 거짓의 끝은 이렇게 끝을 모를 정도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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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