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도문지주 약탈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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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본명 김성주로 불리던 김일성이 15년 동안 반일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회상하고 있지만 내용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시기에 공산비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민간인 가옥에 대한 무장습격과 약탈행위를 한 것도 엿볼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3권 9장 ‘제1차 북만원정’, 2절 ‘부자와 가난뱅이’에서 두만강 연안의 농촌부락들, 중국 길림성 도문에 살고 있던 조선인 지주집에 갔던 일을 자세히 회고하였습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떤 심보 나쁜 지주의 뽕을 빼던 일이다. 그 지주가 살던 마을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조선사람 동네였던 것만은 틀림없다”라며 한 사건을 이야기했습니다.

회고록에 보면 그때 김일성은 전령병 이성림 외에 대원 2명과 함께 조선바지저고리차림(한복)의 사복을 하고 도문 뒷산 부락에서 덩치가 제일 크고 번듯한 기와집을 찾았다고 합니다.

김일성 일행이 문고리를 잡고 대문을 흔들어대자 중년의 한 사나이가 대문을 열고는 언짢은 눈길로 쳐다보았습니다. 김일성이 “주인님, 우리는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해가 저물어가고 갈 곳도 없어 하룻밤 자고 가려고 주인을 찾았는데 신세를 좀 질 수 없겠습니까?”라고 물었죠.

그러자 이 지주는 “정신빠진 놈들”이라면서 “아니, 여기서 한 5리 가면 여관이 있는데 하필이면 왜 여염가에 찾아오는 게야, 여기가 뭐 동네 방앗간인 줄 알아?”라며 욕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지나가는 거렁뱅이(거지)처럼 박대하는 지주를 보자 부아가 동했지만 꾹 참고 태연하게 “주인님, 다리도 아프고 발도 부르터서 더 걷지 못하겠는데 어떻게든지 하룻밤만 자고 가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다른 대원이 “주인님, 여관에 들고 싶어도 돈이 없습니다. 마음을 곱게 쓰면 북두칠성도 굽어본다는데 한턱 내는 셈치고….” 라고 말하자 지주는 “우리 보고 돈을 내란 말이야? 쥐똥같은 소리!”라며 침까지 탁 뱉고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그때를 회상하면서 회고록에서 “혁명을 10년 가까이 해오는 동안 나는 그런 대접을 처음 받아보았다. 우리가 지하활동을 하느라고 많이 다니던 중부만주지방에도 부자들이 많았지만 이 지주처럼 야박하게 구는 사람들은 없었다. 이방에서는 동족들끼리 더 친밀해지는 법이다. 고국에서 살 때 개와 고양이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이국에서 만나면 서로 손을 잡고 정을 나누는 것이 인간의 본심이다. 하지만 우리를 정신빠진 놈들이라고 모욕한 그 지주한테는 인정이라는 것이 개알만치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 도문지주에 대해 회고록에서조차 이렇게 격분을 못 이긴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회고록에서 밝히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이때 도문지주의 행동에 분노했고 이어 그에게서 돈과 천 등의 재물을 약탈하였던 죄로 왕청유격대 정치위원 즉 지금의 인민군대 정치지도원 위치에서 평대원으로 하락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일성이 3명의 대원들을 거느리고 도문지주집을 무장으로 약탈했던 사연은, 그 당시 왕청유격근거지에서 생활했던 증인들을 취재하여 기록한 도서 ‘김일성 평전’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는 그 내용들이 공개되는 것이 두려워 북한당국은 인터넷을 폐쇄하였고 북한주민들이 알 수 없게 만들었던 거죠. 하지만 오늘 그 내용을 자세히 전하겠습니다.

도문지주 습격사건이 발생하자 왕청현위원회에서 통신원이 파견되었고 김일성에게 단도입적으로 질문했습니다. “김 정위 동지, 군복 천은 인질을 납치해서 빼앗은 것입니까?” 여기서 김 정위는 김일성이 당시 왕청유격대 정치위원이었기에 불린 약칭입니다.

김일성은 “아닙니다. 경제모금으로 지주가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입니다”라고 거짓을 말했으며, 그러자 통신원은 자신이 구국군과 연락하는 사람이 있어 그 내막은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동장영까지 이미 다 아는 문제라고 말하면서, 현당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조사할 때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간파한 김일성은 당시 중국공산당 영안현당의 책임자이자 동만지구 특별위원으로 파견된 왕윤성을 먼저 찾아가 자기의 도문지주 습격사건을 직고하였습니다. 왕윤성은 “일단 동장영 동지한테 가서 아무 변명도 하지 말고 잘못부터 성실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하며 김일성을 데리고 동장영에게 갔습니다.

하지만 동장영을 만날 수 없어 대신 동만특위 선전부장 왕중산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김일성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소? 빨리 현위원회에 가서 먼저 그동안의 일을 자세하게 보고하고 처리결과를 기다리시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점점 두려움이 커졌던 김일성은 왕윤성에게 “현위원회에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로 했습니까? 그러면 저한테 처벌을 내리기로 이미 결정했다는 말씀입니까?”라고 물었고 왕윤성은 “상황이 안 좋소. 유격대의 군복 사정은 알지만, 마적들처럼 인질을 납치하고 물건을 노략질한 것으로 비쳐졌으니 말이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고 합니다.

왕윤성은 김일성이 처벌당하는 것을 막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왕청현위원회 서기 송일이 김일성의 유격대 정치위원직을 해제해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하는 데다가 동장영의 파견을 받고 이 회의에 직접 참가했던 특위 조직부장 이상묵까지도 송일의 주장에 찬성하는 바람에 왕윤성도 반대할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평대원으로라도 좋으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를 유격대에 남게 해주십시오”라며 애원했고 현위원회 서기 송일은 김일성을 왕청현위원회 아동국장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대대장 양성룡이 반대하여, 결국엔 김일성은 왕청유격대 제4중대 평대원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렇듯 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나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한 인물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산하 반일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의 왕청유격대에서 한때는 정치위원으로 지냈지만 도문지주 약탈사건으로 평대원으로 떨어지는 등, 당시로는 공산비적으로 소문난 인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북한당국은 진실을 외면하고 우상화선전으로 영원한 김씨왕조를 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