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태권도연맹

김주원· 탈북자
20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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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태권도연맹 창립식.
국제태권도연맹 창립식.
사진-송광호 씨 제공

북녘동포 여러분,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최홍희 총재가 1980년대에 북한에 국제태권도연맹 무대를 옮긴 후 북한당국이 태권도를 체제유지와 대외선전에 이용한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WTF)과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ITF)이 둘로 갈라져 있지만 한반도에서 태권도는 하나의 뿌리에서 생겨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함경북도 길주군 명천에서 태어난 최홍희 총재가 22살 나이에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가라테를 수련하게 된 계기에 대해 ‘호신술을 몇 가지 배워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처음에는 권투를 배워볼 생각’이었고 ‘친구인 김현수의 가라테 수련실인 송도관 방문 설득으로 일본의 가라테 훈련장에 갔던 것’이 후에 태권도를 하게 된 계기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해방 후 고향인 북한이 아니라 남한으로 귀국한 그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군복무를 시작했고 대위를 거쳐 1947년에는 (소좌)소령으로 승급(승진)하면서 육군 본부에서 참모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49년 상부의 결정으로 미국의 군사훈련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6.25남침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에 귀국해 새로 신설된 육군종합학교 부교장을 맡았습니다.

전후 1953년 9월에 보병 제29사단 창설에 전력을 다한 최홍희 총재는 29사단장으로 승진된 후에 부대 내에 태권도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한국군의 다른 부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교육과정이었습니다. 29사단이 육군본부 직속의 제1군단에 배속된 1954년 9월에 제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식에서 최홍희는 부대의 태권도 시범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여준 것이 그가 태권도로 이름을 날릴 기회가 되었습니다. 당시 시범행사의 이름이 당수대회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이승만 대통령이 ‘저것이 우리나라에 옛날부터 있던 택견이야’하고 말하며 ‘전군에 가르치라’고 한 것이 대한민국의 태권도 발전의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1958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윁남 대통령 고딘 디엠이 29사단의 태권도 시범을 보고 감탄하였고 태권도 시범단의 윁남에서의 시범동작 행사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1959년에 최홍희 총재는 서울의 자택에 한국의 유명한 태권도 지도자들을 초청해 하나의 태권도 조직을 결성할 의사를 토의했고 그해 9월 3일에 대한체육회 회의실에서 대한태권도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대한태권도협회 초대 회장을 맡은 최홍희는 1960년 2월에 미국 미사일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 한국군 6군단장에 이어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최덕신의 권유로 말레이시아 대사를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생각도 하지 않았던 외교관이 되었지만 그는 대사관의 참사와 서기관에게 일을 맡기고 태권도 교본 출간을 위한 기술연구에만 골몰하였습니다. 그 기간에 그는 일본의 가라테와 구별되는 천지틀과 단군틀을 만들어 기존에 있던 화랑, 충무, 계백, 을지틀을 합해 도합 20개 틀을 완성시켰고 24개 틀 중에 나머지 4개의 틀도 모두 완성했습니다.

국제태권도연맹이 발족되고 최홍희 총재가 이 연맹을 이끌었으나 대한태권도협회는 여기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최홍희 총재가 집필한 태권도 관련 서적에 대해 일본의 가라테 관련 서적을 모방(표절)하였다는 비난으로 국제태권도연맹과 대한태권도협회는 점점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1971년부터 최홍희 총재는 망명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1972년 3월에 망명하여 카나다 토론토에 도착했습니다.

카나다에 망명한 최홍희 총재는 1년 후인 1973년에 영주권을 받았지만 1973년 8월에 대한태권도협회 김운용 회장이 세계태권도연맹을 결성했다는 소식을 전달받게 됩니다. 최홍희 총재는 자기가 창설한 국제태권도연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세계태권도연맹이 창설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하였고 1973년 볼리비아 태권도협회 결성을 시작으로 독일, 스위스, 프랑스, 애급, 자메이카 등 여러 나라들을 순회하면서 태권도시범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창설된 세계태권도연맹에 대한 국재태권도연맹 최흥희 총재의 분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향해지게 되었고 결국 1975년에는 국내외 여러 신문들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원한이 맺혔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최홍희 총재가 반정부,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분풀이로 최홍희 총재는 1978년부터는 친북국가들이었던 뽈스까(폴란드), 웽그리아(헝가리)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시범단을 파견하였고 1979년 5월 중순에는 15명의 시범단을 이끌고 비공식적으로 북한에 갔습니다. 환갑이 지난 62살 나이에 북한을 방문한 최홍희에게 있어 고향방문은 34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9월 20일에는 당시 조선체육지도위원회 김유순 위원장의 초청으로 공식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1980년까지만 해도 북한주민들은 태권도라는 말을 모를 정도로 태권도 종목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최홍희 총재가 직접 서술한 도서 ‘태권도와 나’에는 그때의 일에 대해 ‘최홍희는 1980년 9월 19일 태권도 시범공연 차 북한방문을 하루 앞둔 전날, 당시 자신의 측근이었던 최덕신에게 이번 시범기회를 통해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할 것이라는 계획을 전했고, 이에 최덕신은 너무 욕심이 과하오, 시범단을 받아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보급까지 하겠다니, 듣건데 거기에도 격술이라는 무술이 있다는데 태권도를 그리 쉽게 받아주겠냐’는 대화내용이 있습니다. 이 대화내용만 봐도 당시에 북한에는 태권도가 보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1980년 10월 10일부터 14일까지 사이에 진행된 북한노동당 제6차대회가 있기 한달 전인 9월에 북한에 방문한 최홍희 총재가 이끈 시험단은 평양과 원산에서 태권도 시범을 선보였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한국에서 군 장성과 외교관 대사까지 지낸 최홍희 총재를 끌어들여 이처럼 남한 고위층까지 지냈던 사람이 이북사회를 더 좋아한다는 선전에 이용하려 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태권도는 정일봉상, 만경대상, 보천보상 등 모든 체육경기에 하나의 종목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태권도 대중화 방침을 근거로 소학년부터 학교들에서도 태권도를 배워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홍희 총재의 노력에 의해 발전해온 국제태권도연맹의 성과에 대해서도 북한당국과 김정일의 현명한 영도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우상화선전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반드시 체제유지에 활용하려는 북한당국의 반인민성은 세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제난에 허덕이는 북한당국은 1990년대부터는 태권도를 외화벌이에 활용하였습니다. 김정일의 정치자금, 노동당의 당자금 마련에 태권도가 이용되었던 것입니다.

북한관련 전문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당국이 태권도 시범단을 해외에 파견하여 행사비로 벌어들인 돈은 한 건당 1만달러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근에도 북한당국은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남미주 등 많은 나라들에 태권도 시범단을 파견하여 외화벌이를 하려고 획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북한이 주도하는 국제태권도연맹은 9개 나라에 불과하지만 한국이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연맹은 208개 국에 8천 여명의 수련인구를 가진 지구상에서 가장 큰 태권도 국제기구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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