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이 ‘세기와 더불어’에서 자신이 중국공산당 산하 반일무장부대인 동북항일연군에서 복무한 사실을 숨기고, 조선인들로 조직한 반일인민유격대를 영도하여 조국을 해방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3권 7장에서 자신이 국제당 파견원 반성위에게 ‘건설동지사’라는 명칭의 당조직을 내온 것에 대해 설명했고 2권 4장에선 중국의 길림성 장춘현 카륜에 있던 진명학교에서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결성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1925년 4월에 조직되었던 조선공산당이 국제당에서 제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새 형의 당을 창건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선 그 방도를 전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회고록과 북한의 혁명영화를 접하면서 김일성이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결성하고 이를 모체로 온성 일대와 두만강 연안 동만 일대 그리고 북부 국경지역 등 여러 지역들에 당조직을 내온 것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동만일대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던 사람들의 증언과 중국공산당 자료들을 보면 그 어디에도 김일성이 결성했다는 건설동지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세기와 더불어에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건된 이후 농민운동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대중운동을 전개하려고 했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상층인물들의 파쟁으로 3년 뒤인 1928년에 그 존재를 끝마쳤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회고록엔 “국제공산당에서는 1928년 여름에 제6차대회에서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취소하였다. 우리는 국제당대열에서 제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분하고 수치스러운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비록 나이도 어리고 공산주의운동경험도 적지만 우리 자신이 주인이 되어 새 형의 당을 창건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면서 김일성은 “새로운 당을 창건하는 데서 또 다른 난관은 국제공산당이 제정한 1국 1당제원칙에 의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만주지방에서 독자적인 당을 창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된 것”이라며 “국제공산당 동양선전부에서는 1930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조중공산당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조선공산당조직문제에 대한 국제당의 결정을 통지하였다”라고 말했습니다.
국제당은 그 결정에서 재만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당원으로 활동할 데 대한 과업을 제기하였고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던 사람들이 중국공산당에 전당하는 바람이 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국제당에 의해 1930년 5월에 하바롭스크에서 조중공산당대표회의가 진행되었고, 두 달이 지난 1930년 7월 중순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길돈 임시당부회의에서 진한장과 함께 중국공산당 예비당원으로 입당하였습니다. 예비당원은 북한 노동당에서 말하는 후보당원과 같은 검토 기간의 당원을 말합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예비당원이 된지 1년 후인 1931년 8월에 중국공산당 안도구위원회 서기 안정룡과 조직위원 김일룡의 보증으로 정식 중국공산당원이 된 것입니다.
당시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위원 겸 왕청현위원회 선전부장이었던 왕윤성(王潤成)은 김일성의 중국공산당 입당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남겨, 김일성이 조선공산당원이 아닌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왕윤성은 생전에 김일성의 본명인 김성주를 기억하면서 “김성주는 이미 돈화에서 중국공산당 예비당원으로 통과되었고, 구국군에 왔을 때 그의 당 소개자였던 마천목이 옥사하는 바람에 나를 찾아와 내가 정식 당 소개자가 되어주기를 바랐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김성주에게 “어떻게 누구를 통하여 공산주의를 알게 되었는가 물었더니, 그의 입에서 생각 밖으로 박윤서 이름이 나왔다. 박윤서는 그때 이미 동만특위에서 당적을 제명당하고 만주 땅에서 실종되었다. 내가 알기로 김성주의 또 다른 입당 소개자였던 한별도 동만주에서 체포되어 용정일본총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당조직관계를 확인하기도 어려웠고 관계 자체도 비교적 복잡해 걱정도 없지 않았으나 항일연군의 제3방면군 지휘자였던 진한장(陳翰章)이 나서서 가슴을 두드리며 보증선다는 바람에 받아들이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중국공산당 산하 동북항일연군 3방면군에 별명이 아바이라고 불리는 군수부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조선 사람이었고 또 ‘청산 아저씨’라고도 불렸는데 본명이 이청산(李靑山)이라고 하더라. 그때 나이가 이미 50세 가까웠다. 이 사람이 나서서 자기가 김일성을 잘 안다고 진한장에게 보증섰던 모양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해 10대 때부터 비적처럼 군자금을 마련한다며 무장을 들고 중국인 지주집들과 조선인 농부집들을 마구 들이쳐 재산과 돈을 약탈하였던 김일성이, 1931년 정식 중국공산당원이 되어 일본군과 만주군의 대토벌로 소련으로 도망친 1940년까지, 근 10년동안은 조선공산당원이 아닌 중국공산당원이었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황당한 거짓을 늘어 놓았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당시 자료에 건설동지사라는 것이 없는 것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을 대비해 회고록에서 “국제당의 지시에도 부합되고 조선혁명도 강력히 추진시킬 수 있는 그런 길이 과연 없단 말인가. 이런 모색 끝에 내가 찾아낸 출로가 바로 당창건의 조직사상적 기초를 착실하게 다지고 그 토대 우에서 명실공히 우리 혁명의 참모부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당을 창건하자는 것이었다”라고 거짓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1930년 7월 3일 카륜의 진명학교 교실에서 차광수, 김혁, 최창걸, 계영춘, 김원우, 최효일 동무들로 첫 당조직을 무었다.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김리갑, 김형권, 박근원, 이제우 동무들도 첫 당조직의 성원으로 되었으며 조선혁명군 대장으로 내정되어있던 이종락과 박차석도 이 조직의 성원으로 되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앞서 말씀드렸지만 1930년 7월이면 김일성이 중국공산당 예비당원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비적처럼 활동했던 김일성이 지금에 와서 당시 같은 시기에 첫 당조직인 건설동지사를 결성했다는 말이 믿어지십니까?
역사왜곡으로 얼룩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그래서 영원한 김씨왕조의 세습을 위해 북한주민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가짜 도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