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일성은 어떻게 안창호를 이용했나

김주원∙ 탈북자 xallsl@rfa.org
2024.03.06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김일성은 어떻게 안창호를 이용했나 도산 안창호 선생의 191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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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는 길림육문중학교 시절 본명 김성주로 불리던 김일성이 시국대강연에서 연설하던 안창호 선생에게 질문을 하여 곤경에 빠뜨렸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1 3길림시절’, 6안창호의 시국대강연에서민족인격완성론이상향론을 주제로 연설하였는데 그 내용이 현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기에 강연을 듣다못해 더 참지 못하고 3가지 질문을 써서 골탕을 먹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회고록안창호의 시국대강연내용의 서두에서 김일성은 독립운동의 원로였던 안창호 선생이 1927 2월 길림에 온다는 소식을 접한 교포사회는 안창호 선생을 국가수반 못지 않게 성대히 영접하였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당시 김일성도 안창호 선생이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작사 작곡한 노래거국가를 부르며 환영하였다면서조선사람들은 안창호 선생의 인품과 실력에 대해서는 대통령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은 우선 등장하는 인물들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다음, 그러나 김일성에 비하면 너무도 부족하다는 내용으로 글을 마감하면서 결국은 김일성을민족의 영웅’, ‘걸출한 지도자로 우상화하는 선전 전략을 펴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도 안창호 선생에 대해 존칭을 빼고안창호라고 이름만을 명명하는 방식으로 그의 지위를 자신보다 낮추려고 꾀하는 방식을 청취자 여러분들도 이미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1878 11 9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안창호 선생은 16살 때에 서울로 올라가 미국선교사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구세학당 보통부에 입학하였습니다.

 

구세학당에서 산수와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접하면서 개화사상을 신봉하게 되었고 독립투사들인 이승만 전 대한민국 대통령과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등이 주관하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였습니다.

 

20살 되던 1897 11월에 서울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연설을 하여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안창호 선생은 그 다음해에는 고향 강서군에 점진 학교와 탄포리 교회도 설립하였습니다.

 

24살 되던 1902년에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를 조직하였으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집 청소와 주변 정리, 겨울철 눈치우기 등 일손을 도우면서 교민들을 하나 둘씩 결속해 나갔습니다.

 

그는 1904 4월에 한인친목회를 더 크게 확장하여 한인공립협회를 창립했고 1905년엔 순국문판 신문인공립신보를 발행하였습니다.

 

1905년 일본의 강도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빼앗기는 것을 목격한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서 을사늑약 반대 항의성명서를 발표하고 독립애국자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 대한협회, 대성학교 등을 설립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을 수차례 오가면서 탁월한 웅변력으로 수천 수만의 국민들을 계몽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연설을 들은 여운형과 조만식 등 유명한 독립운동가들도 감동을 받았으며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의 창립에 참여하여 간사로 활동하면서 신민회 강령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신민회 강령은 크게 5가지였는데첫째, 민족자존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둘째, 함께하는 투쟁동지들을 발굴하여 총력 단결하며 셋째, 국민 개개인의 국민운동 역량을 축적하고 넷째, 미래의 주인이 될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을 촉진하며 다섯째, 각종 상공업을 발전시켜 국민경제의 부흥을 도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08년에 서북학회를 창립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한 안창호 선생은 1910년 망명하여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1919 4 13일에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으로 임명된 안창호 선생은 망명정부였던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임시정부 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승만 전 대한민국 대통령과 소련의 보호를 주장하는 공산주의자 이동휘 사이에 이념 차이로 내분이 심해지자 안창호 선생은 양자간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였고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전 민족이 단결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도 있듯이 1927 2월 유명한 명강사이며 독립운동가인 안창호 선생이 길림에 온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청년학생들은 그가 머무르고 있은 여관에 찾아가서 만주와 길림지역에서 살고 있는 교포들을 위한 강연을 해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곳곳에 안창호 선생의 시국대강연 광고가 나붙었고 회고록에 보면 김일성도 안창호 선생이 오셨다는 소식에 오동진과 밤새 안창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그날 오동진이 나라가 독립된 다음 나에게 대통령 선거할 권리를 준다면 나는 그 첫 번째로 안창호 선생을 추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만 봐도 당시 김일성도 얼마나 안창호 선생을 존경하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각자가 자기를 수양하고 그에 토대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안창호의 주장에는 나도 동감하였지만 우리 민족을 세계적으로 정신적 자질이 가장 낮은 민족이라고 한 그의 견해와 실력양성을 위한 개량주의적 방법론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어 질문지를 작성해 들이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참석자들은 강연술에서는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었던 안창호 선생에게, 한갓 15살 나던 김일성이 이런 질문지를 들이댔다는 사실은 허황한 거짓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당시 도산 안창호 선생은 연설에서만일 너도 한국을 사랑하고 나도 한국을 사랑할 것 같으면 너와 나, 우리가 다 합하여 한국을 개조합시다. 즉 이 한국을 개조하여 문명한 한국을 만듭시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만약 안창호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오늘날 전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대판 봉건왕조국가를 세우고 북한 주민들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든 북한도 개혁개방하여 대한민국 같은 나라로 만들어서 북한주민들도 문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강연에서 역설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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