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실체가 없는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
2024.03.27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을 읽다 보면 ‘구국군’이라는 반일무장부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6장 ‘시련의 해’, 8절 ‘나자구등판에서’에는 김일성이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주보중 총사령을 시켜 중국 구국군 총사령인 왕덕림을 설득하게 했다는 황당한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1933년에 들어서 일제의 동북지방 반일무장부대들에 대한 대토벌이 심해지면서 소만국경을 월경하는 구국군부대 병사들이 많아지자 이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나자구에서 회의를 열었다는 것이 김일성의 주장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당시 수만 명에 달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구국군이 일본이 퍼트린 천하무적설에 속아 자기들이 일본군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주할 생각만 하고 있었고 나자구 회의에서 구국군 총사령인 왕덕림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나는 주보중에게 왕덕림을 설득하여 그가 어떤 일이 있던지 퇴각을 중단하고 유격대와의 연합전선에 나서도록 해보라고 권고하였다”며 “그 사람들이 소련으로 가겠다는 것은 시베리아에 가서 사회주의혁명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소련땅을 거쳐 관내로 도망치려는 것이요”라고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주지방의 반일투쟁을 연구하는 역사전문가들은 김일성의 이같은 주장은 주객이 전도된 역사왜곡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보중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였습니다. 그 후에 동북항일혁명군 제5군장을 거쳐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총사령을 지낸 그가 10살이나 아래인 김일성의 충고를 들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회고록을 보면 김일성의 훈시에 주보중은 “당신들이 아직 속내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구국군이라는 건 사실 겁쟁이들의 집단이요. 일본놈들의 비행기가 우르릉하고 삐라 한 장만 뿌려도 부들부들 떨면서 꽁무니를 빼는 시라소니 무리란 말이요. 그러니 도저히 전투를 해볼 수 없구만… 그렇게 비겁한 무리들을 나는 난생처음 보았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은 비겁한 구국군의 도주를 막기 위해 만주지역 곳곳에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를 만들었고 이 조직을 통해 구국군을 다시 반일투쟁에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자신이 나자구회의 의장으로 회의를 집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읽어보아서 잘 알겠지만 이날 나자구회의 결정에 따라 김일성과 이광, 진한장과 주보중, 호진민이 왕덕림부대, 오의성 부대, 채세영부대와의 사업을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자구회의는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로서는 마지막회의였고 이 회의를 끝으로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가 해체됐다고 했지만 역사자료들과 당시 반일투쟁을 했던 사람들의 증언에는 이런 공작위원회가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으며 많은 목격자들은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라는 명칭은 김일성이 꾸며낸, 실체가 없는 가짜 조직이었다고 말합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2권 마지막절인 8절 ‘나자구등판에서’ 김일성이 주장하는 1932년 여름 이후부터 다음해 2월까지의 김일성의 행적은 한마디로 말하면 독립적인 반일인민유격대의 활동보다 중국인 반일부대인 구국군의 언저리를 맴도는 생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책 내용 중에 김일성이 주장하는 반일공동전선을 펴기 위해 소만국경까지 반일부대들을 쫓아다니었다가 스무살 미만의 18명의 대원을 데리고 노흑산 수림 속에서 엄동설한을 났다는 얘기도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구국군 부대 대원들이 김일성 부대원들의 무기가 탐나서 공격할 위험이 있어 마 씨 성을 가진 중국인 노인의 산막에서 겨울을 났다는 이야기와, 그 산막에 노인이 가져다 놓은 책들이 많아서 학습토론회를 할 수 있었다는 얘기도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짓말입니다.
회고록에는 산막에서 마 노인이 가져다 둔 책들이 많았다며 소설책도, 정치서적도, 위인들의 전기도 있었다고 하였지만 당시 만주지방에는 이런 책들을 지식인들도 구하기 힘들었는데 농부에 불과한 사람이 그것도 산막에 이런 책들을 구해다 놓았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 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산중에 달포 이상 18명의 식량을 대주면서 먹여줄 사람이 없었거니와 산막에서 이런 인원의 식사를 보장하려면 땔감을 때야 하는데 일본의 비행기와 토벌대에 노출되기 쉬워 이것은 불가능한 역설이라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산막은 비행기도 볼 수 없는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산막집이라고 해야 한 장 정도의 삿자리나 겨우 깔 수 있는 크기의 방이었는데 거기에 자그마한 헛간이 하나 붙어있을 뿐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삿자리 한 장 정도 겨우 깔 정도의 산막에 18명이나 들어가 거처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회고록에 기록된 정치서적을 읽고 소감 발표를 하거나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는 주장, 부대를 확대하기 위한 논의를 했다는 이야기는 소설치고는 너무도 공상적인 내용이라는 것이 당시 만주지역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이며 이들은 아마 “김일성이 고작 3~4명의 인원과 함께 살 구멍을 찾아서 마 노인의 집에 와서 신세를 졌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당시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에 창건했다고 하는 반일인민유격대는 그 존재자체가 없었을 뿐아니라 김일성은 그 당시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동북항일연군 한 개 대원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중국에는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대인 국민혁명군과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 군대인 홍군이 있었으며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에 맞서 무장을 들고 투쟁에 궐기한 민족주의 단체나 일반시민들로 구성된 무장부대들이 존재하였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중국군대를 통칭하여 중국 구국군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무장을 들고 싸운 부대들에 대해 통칭하여 독립군이라고 말했던 것과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중국의 구국군은 수만 명에 달했지만 나자구회의 이후 노흑산 골안의 마 노인의 집에 숨어든 김일성의 일행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습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구국군병사공작위원회라는 가짜 조직을 회고록에 등장시켜 마치 자신이 스무 살의 어린 나이에 반일투쟁을 위해, 조중 두나라의 애국세력들을 영도했다고 하는 김일성의 황당한 회고록은 그래서 중국에서 조차 가짜 역사도서라고 비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