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백두의 험한준령을 넘다들며 항일무장투쟁을 진두지휘하여 드디어 조국을 해방하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도 1932년 4월 25일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김일성이 그 이듬해인 1933년 봄부터 왕청을 중심으로 유격근거지에서 반일 투쟁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한 후 1940년 3월부터 해방전까지의 회고를 담은 ‘세기와 더불어’ 8권은 ‘계승본’이라고 해서 당역사연구소에서 출간해냈습니다. 그러나 8권, 1940년대 5년 동안 회고내용에는 김정일을 임신한 김정숙을 데리고 소련으로 도망친 김일성이 소만국경에서 소련군에 잡혀 감옥에 들어갔다가, 먼저 소련으로 피신했던 중국동북항일연군 주보중의 보증으로 풀려나 소련군에 입대한 후 소련군 대위로 복무한 사실은 숨기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북한의 현대사는 김일성의 증조부로부터 그 일가의 창작된 역사를 축으로 엮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고 내용의 기본 줄거리는 거의 같더라도, 이전시기에 나온 선전용역사도서의 내용과는 순서가 다른 거나 새롭게 왜곡된 것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해방 후 1949년에 북한에서 출간되었던 ‘조선민족해방투쟁사’나 1961년에 출간된 ‘조선근대혁명운동사’에는 없었던 내용들이 1968년에 출간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으로 시작하여 1980년대에 출간되기 시작한 ‘조선전사’에 삽입되었는데 이는 비약에 비약을 더해 왜곡 수준이 도를 넘어섰습니다.
이것은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의 유일적 지배가 북한에서 확실시 됐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후계자로 등장하기 시작한 김정일에 의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역사왜곡이 날개를 단 것처럼 절정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중국에서 당시 생존했던, 과거 만주일대의 해방전 반일투쟁과정을 목격했던 사람들마저 ‘창작된 역사’라고 비난했겠습니까?
당시 중국공산당 왕청 나자구 지역 당책임자였던 종자운이 증언한 자료들을 봐도 왕청유격근거지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김일성의 반일투쟁 역사는 북한에서 출간한 지난 해방투쟁사나 전기와는 다르게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 왕청유격구 생활에는 더 많은 왜곡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20여 일 동안 마 노인의 산전막에서 18명의 대원들과 함께 정치토론만 하며 갑갑하게 지내다가 마 노인의 안내로 왕청유격구로 가게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회고록엔 왕청유격구에 도착한 김일성이 마치 유격근거지 내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반면 왕청에 왔을 당시 김일성의 부대 명칭도 회고록에서 밝히지 못하였으며 왕청유격구에 당도하여 어느 조직이나 어떤 형태로 소속했는지 숨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김일성의 불편한 회고 당시의 심리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김일성이 왕청유격구에 당도하였을 당시 이미 그곳에는 1932년 2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 산하의 반일부대인 왕청유격대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당시 양성룡이 왕청유격대 대장으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왕청유격대가 조직되기 1년 4개월 전인 1930년 10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결정으로 동만특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연길과 훈춘, 화룡, 왕청, 안도, 무송, 화전, 액목, 장백 등 10여 개의 현 당조직이 동만특위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933년 2월 당시 중국공산당에 의해 왕청유격구가 창설된 데 대해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먼저 김일성은 “우리가 마 노인을 앞세우고 전각루로 향하던 1933년 2월은 동만 각지에서 유격근거지 창설사업이 기본적으로 완료되어 그 생활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뒤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중국공산당의 산하 왕청유격근거지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숨기고 자신의 주도로 왕청유격구가 변천된 것처럼 회고록에 기록하였습니다. 김일성이 “유격근거지를 건설하고 그에 기초하여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벌이는 것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이미 겨울 명월구회의에서 그 사상을 제시하고 방침으로 채택했던 중심과업의 하나였다”고 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자신에 대해서 사실을 숨긴 것은 물론, 왕청유격근거지를 비롯한 다른 동만지역의 유격구들이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창설되었다는 것을 감추고 자신을 비롯한 조선인 반일애국투사들에 의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습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간도의 산악지대들에 건설된 유격구역들에는 적들과의 첨예한 대결 속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바친 견인불발의 노력과 그들이 겪은 피어린 진통이 깃들어 있다”며 중국공산당이 아닌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노고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왕청유격구를 비롯한 만주지역의 당시 유격근거지들을 영도하였던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의 위치와 역할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김일성이 왕청유격구에서 자신을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의 책원지가 마련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항일근거지들에서 유격대오를 늘리고 당, 공청을 비롯하여 반제동맹, 농민협회, 반일부녀회, 아동단, 적위대, 소년선봉대와 같은 계층별 조직들과 반군사조직들을 내옴으로써 전민항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다”라고 주장을 편 것입니다.
당시 왕청유격구안에 당조직이나 공청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상황이었고 그 이후에 왕청유격대에서 김일성이 정치위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의 결정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김일성이 중국공산당 산하 왕청유격구 내의 중국공산당 정치일꾼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모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보면 볼수록 창작된 역사소설, 왜곡된 역사도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