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일가의 숙청역사-박헌영 숙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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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동포여러분,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북한의 3대 세습은 김씨 일가의 숙청정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의 숙청정치로부터 시작된 북한의 숙청의 첫 피해자는 당연히 남로당 당수였던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파였습니다. 김일성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숙청을 가리켜 ‘피의 숙청’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북한정권의 교육을 통하여 박헌영이 김일성에 의해 미국의 고정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다고 알고 계실 겁니다. 지난 시간에 남조선노동당 당수였던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전쟁을 일으켜서 인민군이 남조선에 진격하기만 하면 남한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20만 명의 당원들과 100만여 명의 지지자들이 호응하여 순식간에 전 조선이 공산통일이 될 것임을 확신시켰던 사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여러 차례 소련과 중국을 방문하여 스탈린과 모택동을 설득시켜 6.25남침전쟁을 일으켰으며 3일 만에 서울을 강점한 사실도 비밀이 아닙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말대로 전쟁만 일으키면 남한의 남로당 당원들과 시민들이 일제히 봉기해 공산사회로 전환되리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이 바라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김일성은 최고사령부에 ‘보도부’를 설치하였고 대대적인 선전을 시작하였습니다. 강점한 서울의 모든 통신과 신문사는 김일성이 세운 서울시 인민위원회의 엄격한 통제와 검열을 받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이승엽을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였고 서울에 새로운 신문사도 내오도록 하였습니다. 1950년 7월 2일에 조선로동당 선전부 산하의 해방일보사와 북한정권의 정부기관지인 조선인민보의 발행소인 조선인민보사가 서울에 생겨났습니다.

그 다음날인 1950년 7월 3일에는 서울에 조선중앙통신사 서울지사를 설치해 방송통신을 시작하기도 하였으나 남한 주민들의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이승엽은 1905년에 남한의 경기도 부평군(지금의 부천시 부평구)에서 뱃사공의 아들로 태어나 인천고등상업학교를 다니다가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퇴학된 후 1923년에 조선공산당 청년동맹에 가입하였던 초기 공산주의자였습니다. 남조선로동당 당수였던 박헌영의 오른팔이기도 했던 그는 박헌영을 따라서 1948년 초에 월북하여 그해 8월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9월에 로동당 비서와 초대 사법상, 내각호위실 부실장, 노동성 부상, 국가 검열상을 역임하였고, 6.25남침전쟁 초기에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그 후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52년 10월에 반당종파분자라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그 다음 해에 반당종파분자, 미국고정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953년 3월 인민검열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1954년에 숙청당하게 됩니다.

같은 남로당 출신이면서 이승엽의 상관이었던 박헌영이라고 무사할리 없었습니다. 남한봉기설을 주장하면서 전쟁초기 서울에 내려와 대한민국의 삼성회사 이병철 초대회장의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공산사회가 다 된 것처럼 환상에 빠져있던 박헌영은 의외로 남한주민들이 김일성이 일으킨 침략전쟁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호응하지 않자 방송연설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방송연설에서 그가 한 연설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와 같은 엄숙한 시기에 왜 남조선 인민들은 모두 떨쳐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까?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모든 인민들은 하나같이 일어나 전 인민적, 구국적 정의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미국은 전쟁이 발발한지 80여 일이 지난 1950년 9월 15일에 작전암호명으로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고 부르는 인천상륙작전을 강행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해방지역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김일성은 인민군 총정치국을 신설하고 박헌영을 총정치국장에 임명하였지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의 갈등은 커갔습니다. 당시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을 직접 목격했던 중국대사 예지량의 증언에 따르면 인천상륙작전으로 포위망에 들었던 인민군을 박헌영은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김일성은 유격전을 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전략적 후퇴시기’라고 교육하고 있는 1950년 11월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압록강 연안의 만포진에 설치되었던 북한주재 임시소련대사관에서 전쟁책임을 가지고 공방이 붙었는데 술에 취한 김일성이 박헌영에게 잉크병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 광경을 목격했던 박길용 외무성 부상은 김일성이 “당신이 우리가 전쟁을 일으키기만 하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빨치산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질타하였고 박헌영이 “왜 낙동강에 인민군대를 죄다 내려 보냈는가?”고 반박하면서 언쟁을 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박헌영의 숙청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고산진혁명사적지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닐 때 자강도 만포시 고산진에 있는 고산진혁명사적지를 답사한 적이 있는데 당시 해설원이 고산진에 위치한 최고사령부에도 미군 비행기의 기총탄사격이 있었다면서 당시 그 흔적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박헌영도당을 비롯한 미고용간첩들이 최고사령부위치를 알려주어 김일성을 죽이기 위해 이렇게 비행기까지 동원되어 총탄사격과 폭탄투하가 있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1952년 8월 김일성은 이승엽을 비롯한 13명의 간부들을 '반역자'로 체포하였고 그해 10월 박헌영은 가택 연금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53년 3월에는 박헌영에게 '미제 고용간첩'이라는 딱지를 붙여 체포하였습니다. 그는 평안북도 철산군에 있던 정치범관리소에 끌려가서 고문을 받았습니다.

박헌영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소련공산당에서는 김일성에게 그가 미제고용 간첩일 수 없다고 하였지만 김일성은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박헌영과 그 일당들이 당내에 종파세력을 형성하고 전선사령부 정보를 미국에 빼돌려 전쟁이 패배하도록 일조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북한정권이 박헌영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를 급히 처형했다가는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1955년 12월 15일에 박헌영에 대한 재판이 북한의 최고재판소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재판명은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간첩사건’이었습니다. 재판에서 박헌영에게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사형과 전 재산 몰수형이 선고되었습니다.

판결문에는 박헌영이 1925년 11월에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조직의 비밀을 자백하였고 앞에서는 미군정을 반대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미군 하지중장의 지시를 받으면서 공산당을 친미의 방향으로 인도하여 남로당조직을 노출시켜 파멸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월북한 이후에도 이승엽과 이강국을 통해 미군정에 정보자료들을 제공하였고 6.25남침전쟁기간이었던 1952년 9월에 쿠데타로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박헌영을 미제고정간첩으로 몰아 붙인데는 그가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불리던 ‘YMCA에서 활동하였던 경력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YMCA는 영어로 기독교청년연합(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입니다. 이 연합은 1907년에 대한민국에 들어왔고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박헌영이 미국 선교사인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언더우드를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이 증거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YMCA에서 활동하였던 시기는 그의 나이가 20대 시절이었고 이것으로 미국의 간첩이라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김일성은 자기보다 공산주의 활동경력이나 학벌 등이 뛰어났던 박헌영과 남로당파의 간부들을 자기의 정치적인 적수로 여기고 무자비한 숙청의 칼을 쳐들었던 것입니다. 당시 김일성에 의해 처형된 남로당원들로는 박헌영과 이승엽, 이강국, 임화 등 수십여 명에 달합니다.

이로써 더 이상 김일성에게는 남로당이라는 존재가 사라졌지만 그 이후에도 갑산파라고 불리던 정치세력들이 숙청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다음시간에도 김일성에 의한 국내파숙청에 대해 살펴보기로 약속드리며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