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우상화-초상화정치

김주원· 탈북자
201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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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5년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평양 김일성 광장에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지난 2015년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평양 김일성 광장에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21세기 지구상에 가정집이나 공장, 기업소는 물론 공공장소의 건물 벽에도 사망한 사람의 얼굴을 형상한 초상화를 걸도록 하는 나라는 북한이 유일합니다. 북한에서 살다가 탈북하면서 중국을 거쳐 동남아시아 나라들인 타이(태국), 버마(미얀마), 윁남(베트남) 등 다른 나라들을 거치면서 가장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그 어느 나라에도 그 나라의 국가수반의 초상화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도 학교나 가정집, 공장들에 초상화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북한만 김부자의 초상화를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가정집 벽에도 걸게 하는 이유에 대해 의문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씨 일가의 우상화를 위한 북한의 초상화정치에 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북한에서 초상화는 김일성을 신처럼 여기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낸 우상화 상징물입니다.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는 북한의 모든 가정집은 물론, 학교 교실의 칠판 위에, 사무실이나 공장 회의실, 역전 건물 벽 중앙, 지하 전동차 안벽 등 그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가정집에서 부부가 잠을 자는 방의 벽에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한 탈북자는 “저녁에도 수령님이 지켜보는 것 같아 불을 끄고 자곤 했다”고 말할 정도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북한에서 초상 사진은 김일성이 조선반도(한반도)의 공산화를 목적으로 6.25남침전쟁을 일으킨 1950년 7월 10일에 방송연설을 하는 사진을 실은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처음 찍힌 것은 해방 후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모란봉구역개선공원에서 개선 연설을 하는 모습이었지만 그 사진은 오랫동안 공개되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사진촬영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조수로 일하였던 서영진이었습니다. 개선 연설을 하는 모습의 사진에는 김일성이 가슴에 소련군 적기 훈장을 달고 있었고 그 뒤에는 당시 북한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던 소련군 장교들과 태극기 깃발이 있었기에 공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진을 합성하여 주석단에서 가슴에 훈장을 달지 않은 김일성이 단독으로 나와서 연설하는 사진으로 바뀌어 공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에는 김일성 빨치산파 외에도 소련파, 중국 연안파, 국내파 등 정치경쟁세력들이 존재하였기에 김일성의 초상화를 지금처럼 곳곳에 내걸 수 없었습니다. 1967년 북한에서 박금철 부수상 등 국내파에 대한 종파숙청으로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가 확고히 세워지자 김정일은 김일성을 신성화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초상화 제작을 발기하게 됩니다. 김정일의 지시로 1968년에 만수대창작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의 초상화를 제작하였고 처음에는 중앙당과 중앙기관 사무실들에 배부되어 걸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등장한 초상화 속 김일성의 모습은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정면을 응시하던 김일성의 초상 사진은 1969년, 1년 만에 바뀌었는데 그 초상화는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까지 약 25년 동안 변하지 않고 사용되었습니다. 달라진 초상화는 김일성이 정면에서 약간 몸을 비껴서 서있는 자세로 바뀌었는데 그에 대해 전문가들의 의견은 정면 사진은 죽은 사람의 초상 사진처럼 보이기에 재 제작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의견은 성경 속 예수님의 형상이 정면이 아닌 비껴선 자세여서 김일성도 신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19세기 지구상에 초상화가 존재했던 나라들과 인물들을 보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독일의 히틀러 등 공산 독재와 파쑈 독재를 자행했던 독재자들이었습니다. 김정일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과정에 모택동의 초상화가 확산되면서 공산 독재가 활성화되는 것을 목격하고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초상화정치를 더 강하게 밀어붙일 계책을 꾸몄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이후로는 가정집들은 물론 공공장소에도 모택동의 초상화를 볼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 초상화 제작은 만수대창작사가 담당하였습니다. 김정일은 만수대창작사 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만수대창작사에 가장 중요한 사업은 수령님의 영상을 최상의 수준에서 형상함으로써 수령님의 권위와 위신을 백방으로 보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초상화들은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대학 등 학교의 교실들에도 빠짐없이 걸도록 하였고 공장과 기업소의 사무실들과 당, 행정기관, 인민군 군인병실들에도 배부되어 걸어야 했습니다.

초상화액틀과 초상화유리들이 목재공장들과 유리공장들에서 생산되어 공급되었으며 당에서는 누락된 장소들을 찾아내서 초상화들을 걸도록 하였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모든 가정집들에도 초상화가 배부되어 집에서 가장 깨끗하고 밝은 장소에 걸도록 하였습니다. 학교들과 기업소들에서는 초상화를 관리하는 체계가 세워졌고 가정집들에서도 초상화 검열에서 먼지가 낀 불결한 상태가 발견되지 않으려고 집집마다 여기에 신경을 써야만 했습니다.

명절날에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초상화 벽 밑에 나란히 세워놓고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인사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학교들에서는 순번대로 초상화정성작업을 진행하여 항상 청결성을 보장해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학교 다닐 때에 담당 순서가 되면 책상과 걸상을 이용하여 작은 키에 힘들게 정성작업을 하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은 학급 교실의 초상화에서 먼지가 나와 담임선생님이 학교 초급당 비서에게 욕을 먹고 봉창으로 저희들을 학교운동장을 20번이나 달리기를 시키던 일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합니다.

1980년대에는 김일성 초상화에 이어 김정일의 초상화가 나와서 두 개의 초상화를 동시에 걸도록 하였고 ‘3대위인상’이라고 하면서 김정숙의 초상화도 걸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당시 경제난으로 북한의 가정세대들에는 유리창에 댈 유리도 없어 비닐박막으로 창문 바람을 막으면서도 우상화를 위한 초상화유리는 우선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이사를 하거나 작업을 하면서 초상화가 훼손되면 부모들은 조직적인 비판을 받았고 기업소 책임일꾼들은 해고되거나 심하면 정치범으로 처형되는 일도 빈번해졌습니다.

초상화정치는 사람을 죽는 순간에도 초상화를 부둥켜안고 죽는 참상도 빚어내게 하였습니다. 화재현장에서 죽으면서 김일성의 초상화를 안고 죽은 사람에 대해 훈장이 수여되었고 사회적으로 본보기로 강조되면서 많은 초상화 영웅들이 생겨났습니다. 살아생전에는 무뚝뚝하고 무표정하던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는 그들이 사망하면서 ‘근엄한 표정’에서 환하게 웃는 ‘미소 짓는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만수대창작사의 김성호, 김성민의 합작으로 미소 짓는 김일성 초상화는 영결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김정일은 이 초상화에 대해 “보면 볼수록 생존 모습 그대로의 인상이 강하다”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김정일은 태양같은 환한 미소를 짓는 김일성을 형상한 초상화이니 ‘태양상’이라고 부르도록 지시하였고 지금 북한에서는 이 초상화를 태양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사망하고 한 달 후인 1994년 8월부터 예전의 김일성 초상화들은 모두 태양상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흰 머리카락에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김일성의 초상화가 집집마다 걸렸고 마을마다 대형주제화가 태양상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북한주민들은 고난의 행군으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으며 생사를 건 탈북 행렬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양상이 악령을 불러왔고 북한을 지옥의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입니다.

김정일이 사망한 이후 인민군창작사 리성일 화가가 김정일의 웃는 초상화를 그려냈고 지금은 그 어디에 가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미소 짓는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태양상이 곳곳에 있는 북한은 수십년 김씨 일가가 3대 세습을 하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융성 번영하였지만 점점 더 가난한 나라로 전락되어가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선친들이 하던 그대로 초상화정치를 꿈꾸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죄악을 불러와 멸망의 길을 재촉할 것임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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