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김정일인 김정기 박사의 개명

김주원∙ 탈북자
201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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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2주기를 맞아 국가우표발행국에서 발행한 기념우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2주기를 맞아 국가우표발행국에서 발행한 기념우표.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고칠 것을 강요하는 나라가 이 세상에서 오직 북한만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는지요? 과거 사회주의 길을 걷던 나라들도 국가지도자와 이름이 같다고 개명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하려는 사회과학원 주체경제연구소 부소장 김정기 박사는 본명이 김정일이었고 1960년에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김정일과 함께 대학생활을 했습니다. 대학졸업 후에는 주체사상 선전에 열을 올렸습니다.

북한은 김정일이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내놓은 1974년부터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개명을 강요했습니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당시의 북한에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개명하라는 요구에 그 누구도 반발할 수 없었습니다.

1974년은 김정일이 노동당 중앙위 선전선동부에서 활동하며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지도체제’를 내놓은 시기입니다. 외부에 공개만 안 했을 뿐 내부적으로는 이미 김일성의 후계자로 김정일을 내세우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김정일은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지도체제’를 내놓으면서 수많은 도서들을 불태우고 가혹하게 지식인들을 학대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중국에서 한창 일고 있었던 문화대혁명이 김정일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당시 북한은 일성이라는 이름을 바꿀 것을 강요했지 정일이라는 이름까지 바꾸라고는 하지는 않았습니다. 1960년대 대학에 김정기 박사는 독재자 김정일과 이름이 같은데다 대학 학부까지 같아 학생들 속에서 늘 혼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키가 큰 김정기 박사를 김정일이라 부르고 키가 작은 독재자 김정일은 러시아에서 지은 이름인 김유라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남산중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김정일은 이름이 김유라였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같아서 그런지 대학에서 김정기 박사와 김정일은 ‘딱친구’로 불릴 정도로 가까웠다고 합니다.

북한은 1980년 6차당대회에서 김정일을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선포했습니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선포되면서 정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민들은 모두 다른 이름으로 개명을 하라는 노동당의 지시가 전국에 하달됐습니다.

사회과학원 주체경제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던 김정기 박사도 김정일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지금의 김정기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는데 문제는 이미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수많은 논문들과 경제 분야에 대한 도서들이었습니다.

저자가 김정일로 됐다는 이유만으로 김정기 박사의 논문과 도서들은 모두 회수돼 불태워지거나 이름들이 다 바뀌었습니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빼앗긴데다 심혈을 기울인 논문과 도서들도 모조리 불태워지자 김정기 박사는 크게 분노했다고 합니다.

개명을 한 후 김정기 박사가 사회과학원 주체경제 연구소에서 눈에 띄는 논문과 도서집필 활동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그가 느낀 분노가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케 했습니다. 김정기 박사는 김정일의 대학동창들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인물입니다.

대학시절 김일성의 이름을 등대고 김정일은 평양시 곳곳을 돌아치며 물의를 빚었습니다. 대학생들 속에서 김정일은 ‘망종(막나니)’으로 낙인찍혔는데 그 때문인지 김정일은 자신의 과거를 잘 아는 대학 동창들을 권력에 끌어들이지 않았습니다.

김정기 박사는 김일성의 후처였고 조선여성동맹 위원장이었던 김성애의 오빠인 김성갑과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이 곁가지라는 구실로 의붓동생들인 김평일과 김영일을 차별하면서 김성갑도 정치적으로 매장 당했습니다.

사실 김성애의 가족들을 곁가지로 쳐낼 때 김정기 교수도 비판대상이 되어 하마터면 농촌으로 추방될 뻔 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시절 친구가 없었던 김정일을 따뜻이 대해준 게 크게 영향을 미쳤는지 김정기 박사는 처벌을 면했습니다.

비록 권력의 자리에는 끌어들이지 않았지만 김정일은 노동당 중앙위에서 사업을 시작한 첫해부터 설날이 되면 대학 동창들에게 꼭 신년축하장과 선물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김정기 박사도 해마다 김정일이라는 본명으로 선물을 받아왔습니다.

선물 명함 장에 “김정일에게, 김정일로부터”라고 씌어져 있어 사무실 간부들도 김정기 박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름을 개명한 1981년 새해에 받은 선물에는 “김정기에게, 김정일로부터”라는 명함장이 왔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친분까지 무시하는 김정일의 행동에 김정기 박사는 황당함과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그런 미안함을 알아서인지 김정일은 훗날 보통강구역 서장동에 지어진 40층짜리 호화아파트의 집 한 채를 김정기 박사에게 선사했습니다.

그러던 김정기 박사는 1994년 8월 20일 중국에서 열린 동북아세아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해 주체경제연구소의 이름으로 ‘동북아경제협력과 조선의 새로운 발전전략’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세상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의 동아일보는 1994년 8월 22일자 신문에 ‘북한 과감한 개방추진’이라는 기사를 내고 “김정기는 북한의 경제정책 작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김정일의 심복 브레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북한이 정책구상을 이 같은 형태로 대외에 공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김정기 박사는 논문에서 북한은 이미 가공무역, 중계무역, 재수출무역을 적극 추진하기 위한 합영합작 형태의 기업 및 은행설립과 나진 선봉에 대한 자유경제무역지대, 자유항 등 특별지구 설정이 곧 잇따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김정기 박사의 논문은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이 권력을 이끌면서 처음으로 내놓은 경제 전략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김정일이 권력을 잡은 후 김정기 박사는 경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된 마당에서 김일성까지 사망하고 나자 김정기 박사는 시장경제를 적극 추진하며 김정일의 측근으로 거듭났습니다. 2002년에 있었던 북한의 “7월 1일 경제관리조치”도 김정기 박사가 깊숙이 개입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첫 신호로 김정일 정권이 내놓은 “7월 1일 경제관리조치”는 북한의 보수적인 간부층들과 부정부패세력들에 의해 끝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7월 1일 경제관리조치”가 실패한 후 김정기 박사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뼈아픈 좌절을 겪은 김정기 박사는 북한의 경제계에서 물러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집니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꿈꾸며 김정기 박사는 인민대학습당에서 경제일꾼들을 만나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는 모임을 자주 가졌습니다.

저도 그 모임의 일원으로 인민대학습당에서 김정기 박사를 자주 만났고 의견교환도 해보았지만 뼈아프게 통감한 진실은 폐쇄된 북한사회에서 독재자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개혁과 개방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이름까지 빼앗기고 그 이름 석 자 때문에 논문과 서적들마저 모조리 불태워져야 했던 불우한 인생, 그런 속에서도 허약한 경제를 추켜 세워보려고 발버둥 치던 김정기 박사의 기구한 일생은 북한이라는 지는 낙엽을 연상케 해 씁쓸함을 달랠 길 없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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