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날조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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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에선 ‘북한 구금시설과 사법제도’에 대해 지난 3월부터 거의 4개월 동안 설명드렸습니다. 방송을 통해 북한은 전대미문, 동서고금에서 찾아보기 드문 폭압정치로 자국민을 위협하는 현대판 김씨 왕조임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을 겁니다.

오늘부터는 여러 시간에 걸쳐 김일성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세기와 더불어’가 어떻게 날조되었는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김일성 연구의 기수’로 불리는, 전 성균관대학교 이명영 교수가 집필한 「김일성회고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내용도 참고하며 방송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성균관대학교 이명영 교수는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중앙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도 근무하면서 자신의 고향인 북한에 대해, 정치학자의 입장에서 많은 연구를 진행했던 분입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것처럼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김일성이 탄생 80돌이 되던 1992년 4월부터 집필하다가 2년 후 사망하자 노동당 역사연구소에서 계승본 형식으로 1998년 7월까지 4년 동안 만든, 선전 선동용 창작물입니다.

세기와 더불어의 내용은 상당한 과장과 윤색, 날조가 들어가 있어서 객관성이 전혀 없으며 김일성의 가계와 더불어 그가 10대부터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반일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조작하였습니다.

1990년대가 되면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하였거나 살아계신 분이라고 해도 영향력도 부족해지고 인지능력도 쇠진해진 상태여서 가짜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의 날조된 내용에 대해 반박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김일성에 의해 국내파와 연안파, 소련파 등 반일애국자들이 숙청되었고 한국에서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과소평가된 점 때문에, 김일성은 모든 반일투쟁사를 가로채 전부 자신이 혼자 한 것처럼 조작하기에 무리가 없다고 본 것 같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동북3성 지역에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일제의 ‘만주국치안숙청계획’으로 항일연군이 궤멸상태에 빠지자 더 이상 만주지역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김일성은 1940년 10월 23일에 10여 명의 소부대 인원과 함께 소련국경을 넘었습니다. 이 사실은 회고록에서도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련극동군사령부 소속의 88저격여단 소련군 대위로 5년 동안 복무하다가 1945년 9월 19일에 소련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에 양복을 입고 입항하였던 사실은 회고록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계승본 7권의 21장 ‘소련을 무장으로 옹호하자!’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싸우는 우리에게 있어서 노동자, 농민의 정권이 수립된 소련은 문자 그대로 이상향이었으며...(중략)...우리는 피를 흘리더라도 소련을 보호하고 고수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세기와 더불어’ 8권은 1940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5년 동안의 김일성의 회고를 기록한 책입니다. 8권에 수록된 22장과 23장, 24장 내용은 소할바령회의 이후 소부대활동을 하게 된 내용과 소련에서 국제당의 연락이 왔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도 8권을 보면 김일성이 일제의 토벌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소련국경을 넘었던 사실, 정확히 표현하면 도망을 친 것에 대해 마치 국제당에서 연락원을 보내서 소련에 오도록 했다고 언급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회고록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내가 국제당의 연락을 다시 받은 것은 1940년 10월 중순이었다...(중략)... 국제당에서 파견한 연락원 2명은 원동군사령부 류쉔꼬 장령이 국제당 명의로 보낸 전달사항에, 12월에 하바롭스크에서 진행되는 회의에 참가해달라고 했다”

22장 4절은 ‘1940년 가을’입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 복무시기를 언급하기 꺼려하던 김일성과 북한 노동당 당역사연구소는 4절에서 “최근 나는 항일혁명역사를 소개선전하는 글들을 읽어보는 과정에...(중략)... 소할바령회의를 전후한 시기의 자료들이 많지 못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우리가 원동으로 들어갈 준비를 끝내고 처장츠치기를 떠난 것은 10월 말경이었다”고 적었으니 소련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과 결국 해방 전 5년 동안은 소련군대에 입대하여 복무한 사실에 대해 인정하는 꼴이 돼버렸습니다.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 극비문서들이 외부에 유출되었는데 이를 통해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의 소부대 가운데서 가장 먼저 소련으로 도피한 것이 알려졌으며 그 이유는 김정일의 출생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동북항일연군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건국되고 일제의 대토벌이 심해지자 거의 붕괴에 직면하게 되었고, 1940년 말부터는 소만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입국하는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던 동북항일연군 소부대들도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들에서 설명한 것처럼 김정일의 생일은 1942년이 아닌 1941년 2월 16일입니다. 김일성의 생일연도인 1912년과 정주년을 맞추기 위해 1942년으로 생일을 고쳤지만 당시 김일성의 소부대를 따라 소만국경을 넘었던 여대원 서순옥의 회상록에는 정확히 1941년에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적혀있습니다.

김일성의 소부대가 소만국경을 넘었던 1940년 10월 23일, 김정숙은 김정일을 임신한 상태였는데 임신 약 7개월이었다고 합니다.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상관이었던 중국공산당 동북지구당 서기 주보증도 당시의 일기장에 “김일성이 애인 김정숙과, 몇 명 안 되는 인원이 함께 소만국경을 넘어 하바롭스크에 은신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김일성이 당시 상부인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 지휘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소만국경을 넘었다는 이유로 김일성에게 책벌을 주는 문제가 논의되기도 했지만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소련공산당의 요청으로 강을 건너게 되었다”고 거짓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김일성과 함께 소만국경을 넘었던 서순옥 등 부대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김정숙이 임신한 것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자 소련으로 들어가기 전에 흑룡강성 동녕에서 간단한 야전결혼식을 올렸고 대원들도 소박한 결혼을 축하했다고 합니다.

소련으로 입국한 김일성의 소부대는 불법월경자로 소련국경수비대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나 먼저 소련에 나와 있던,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상관 주보증에 의해 풀려나게 되고 김일성은 소련 극동사령부 88저격여단의 소련군 군인으로 복무하게 됩니다.

김정숙은 1941년 2월 16일에 연해주 보로실로프 인근 라즈돌리노예 병영이 있는 바츠코예 마을에서 득남을 했는데 그가 바로 김정일이었습니다. 김정일은 소련식으로 ‘유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김정일은 죽기 전에 소련을 방문하면서 자기가 태어난 곳을 찾아보기도 했죠.

김일성과 노동당 당역사연구소가 현대판 김씨 왕조의 영원한 계승을 위해 1%의 사실에 99%의 거짓을 꾸며서 ‘세기와 더불어’ 같은 선전 출판물을 만들어 주민들을 세뇌시키려고 하지만 역사는 진실만이 증명해줄 것입니다.

가짜 고향인 백두밀영으로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했던 김정일, 과연 재포출신의 기쁨조 무용수 고영희의 아들로 태어난 김정은이 아직도 고향과 생일을 공개하지 못하고 숨기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은 날조된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의 김정일 출생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