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12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의 3절과 4절에는 김일성과 장울화에 대한 내용으로 전개되어 있지만 여기엔 은폐된 사실이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2022년 3월 김정은은 생일 90돌을 맞은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에게 “우리 인민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울화 열사의 혁명정신을 가족들이 대를 이어 빛내어 나갈 것과 부디 행복하고 건강할 것”을 기원하는 축하전문을 보냈다는 소식이 노동신문에 실렸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장울화는 중국 무송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였던 장만정의 아들로서 김일성이 무송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알게 된 친구입니다. 회고록에는 장울화의 아버지 장만정이 무송일대의 농장을 소유하고, 인삼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에 걸려 명의를 물색한다는 소문을 듣고, 김일성의 부친인 김형직이 장만정을 치료해준 것이 결국 두 가정의 인연으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형직은 무송 거주 승인을 장울화의 아버지인 장만정에게 부탁했고 그의 도움으로 의원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만정은 무송에서 중학교 교장으로서 활동력이 있어, 사회장이라고 불리던 사춘태 교육회 회장과 함께 김형직의 무송거주와 의원 승인을 받는데 조력했다는 것이 김일성의 주장입니다.
회고록에는 장만정이 무송현 정부 측을 직접 찾아가 “조선인 망명자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시내에 들어와 의원을 차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 그의 거주를 승인해주면 일본놈들의 도발에 걸려들 것 같아서 당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강탈한 일본놈들을 반대해서 싸우는 것은 응당한 일이 아닌가”라고 설득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당신도 친일파는 아니니 승인하면 좋지 않은가, 여기에 일본영사관도 없는데 겁날 게 무엇인가, 림강에서 파견되어오는 영사관 경찰들과 밀정들만 속이면 될 텐데 김형직이 무송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무송현의 현장은 김형직의 무송 거주를 승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울화의 아버지 장만정은 김형직이 폐교된 백산학교를 복구한 다음 다시 인가를 얻으려고 안타깝게 뛰어다닐 때에도 현 상무회 부회장 겸 교육회 위원의 자격으로 유지들과 함께 현 정부 측을 설득하여 인가를 얻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이 김일성의 주장입니다.
김일성은 “우리 일가 앞에 타개하기 어려운 생활상 고충이 가로놓일 때마다 장만정은 수고가 필요하면 수고를 바치고 금력이 필요하면 금력을 바치면서 온갖 성의를 다하여 사심 없는 도움을 주었다”라며 “장씨일가의 방조는 김형직이 세상을 떠나간 후에도 계속되었고 또한 어머니(강반석)가 혼자서 자식들을 데리고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자주 돈도 보내주고 음식도 보내주곤 했다”고 회고록에 적었습니다.
아버지인 장만정이 그러했듯이 아들인 장울화도 김성주였던 김일성에 대해 지극했다고 합니다. 김일성보다 1살 아래인 장울화는 1913년 2월 13일 길림성 통화성에서 출생한 중국 한족 출신입니다. 그의 아들 장금천의 증언에 따르면 장울화는 1929년에 혁명사업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지하사업단에 있다가 1937년 11월 4일 내부역적의 반변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4살로 아들 장금천은 3살, 딸 장금록은 금방 태어난 때였습니다.
북한에서 장울화는 손정도 목사, 러시아인 노비첸코와 함께 김일성의 생명을 구원한 은인으로 불려집니다. 김정은은 작년 장울화의 아들 장금천 생일 90돌을 맞으면서 보낸 축하서한에서 “항일혁명투쟁시기 수령님의 신변안전을 목숨으로 지킨 장울화 열사의 소행은 조선인민의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다”고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여기는 장울화를 기리기 위해 2006년에 중국 길림성에 장울화 열사릉을 세웠는데 그 설계는 평양도시건설연구소가 맡아서 진행했고 북한에서 적지 않은 자재도 보내주었습니다.
1932년 여름 김일성이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에 들어가기 위해 구국군 부대의 한 개 별동대로 남만 원정을 하였던 사실을, 김일성은 마치 자신이 항일유격대를 창건했다고 역사를 왜곡했습니다.
당시 김일성을 찾아간 장울화는 김일성과 함께 활동하던 부대 이름을 구국군 별동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왜 구국군 별동대라도 부르고 있냐?”고 반문하자 김일성은 자신이 구국군 별동대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김일성은 “공산당과는 진짜 손을 끊은거냐?”고 묻는 장울화에게 “아니 내 말을 못 알아듣네, 구국군과 함께 활동할 때는 구국군 별동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따로 떨어져 활동할 때는 유격대라고 해도 되고 또는 조선혁명군이라고 봐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서 해방 후 출간된 도서들과 그 이후 출간된 도서들에서 항일유격대 창건에 대해 조선혁명군이니, 반일유격대니 그 명칭들이 자주 바뀐 것은 사실 김일성이 당시에 양세봉부대에 들어가기 위해 구국군 별동대로 활동하였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군인으로 활동한 사실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장울화가 자신이 있는 행적을 대라는 일본군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자살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1937년 일본에 의해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이를 반대하는 활동을 하던 장울화가 밀정의 밀고로 체포되어 자살한 것입니다.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해 장울화의 희생을 마치, 김일성의 목숨을 지켜 자기의 목숨도 서슴없이 바친 것처럼 선전하고 있지만 사실은 동북 3성에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된 것입니다. 결국 양세봉의 구국군에게 받아달라고 조르다가 별동대라는 명칭을 얻어 20~30명의 청년들로 반일 투쟁을 한답시고 중국공산당 산하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였던 김일성, 또한 일제 토벌을 피해 1940년대에는 5년 동안 소련으로 숨어들어가 소련 군인으로 복무한 것이 그의 20~30대 숨겨진 과거입니다. 따라서 그가 쓴 회고록은 가짜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를 날조하여 강압적인 현대판 김씨 왕조를 대를 이어 계속하려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의 야망은 정의와 진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