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길회선철도부설 반대투쟁의 진실과 거짓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 기념 우표.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 기념 우표. (/조선의 오늘 웹사이트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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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역사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회고록 1권 3장 5절 '단결의 시위'에서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책임자로서 약 40일 동안 지속했다는, 길회선철도부설 반대투쟁을 영도하였다는 내용의 허구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내가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 책임자로서 중국청년학생들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은 것은 . . . 중국계통으로도 공청사업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지난시간들에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 만주지방에서 조선청년들로 이루어진 공산주의 청년조직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과거의 김일성 즉 어린 김성주는 10대 때부터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해 중국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길회선철도부설 반대투쟁은 16살 나던 김일성, 당시 김성주가 주동이 되어 진행된 시위투쟁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철도부설을 꾀하던 일제에 대항해 투쟁한 내용이라는데 대해 자세히 설명하려고 합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일제가 동북의 성소재지 길림과 조선의 북부국경도시 회령사이를 연결하는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완공하려고 서둘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 목적에 대해서는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고 나아가서 이 지역을 정치군사적으로뿐아니라 경제적으로 틀어쥐고 저들의 상품을 여기에 대량으로 들이밀어 막대한 이윤을 짜내려는 일제의 흉악한 속심이 깔려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공사와 일본상품을 배척하는 투쟁이 가지는 의의와 대중투쟁의 성숙된 요구를 헤아리고 1928년 10월 상순 북산공원 약왕묘지하실에서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16살이었던 김성주가 이런 회의를 주도할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을뿐더러 당시 김성주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자신이 그 회의에서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저지파탄시키자'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였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한번 하면 처음에는 속이 떨리지만 자주하다보면 점차 얼굴이 철판을 쓴 것처럼 뻔뻔해지다가 나중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 역사사기꾼이 된다는 것은 지난 역사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와 당시 히틀러의 언론나팔수였던 선전부장 괴벨스도 '거짓말도 백번하면 진실이 된다',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대중은 속아 넘어간다', '대중은 거짓말을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엔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결국에는 믿게 된다'는 등의 수많은 선전선동 궤변 명언을 내놓았습니다.

어찌 보면 김일성은 괴벨스의 거짓선전 명언을 삶의 좌우명으로 여기고, 살아온 전 기간 이를 써먹은 북한 3대독재의 원흉이며 그 자손들인 김정일과 김정은도 그것을 삶의 철리로 여기고 있는 듯합니다.

김일성은 도를 훌쩍 넘어 회고록에서 1928년 여름 자신의 지도 밑에 길림육문중학교 학생들은 교내에서 일제의 강도적인 제2차 산동출병과 제남에서의 학살만행을 규탄하는 대중적인 항의운동을 매일 같이 벌렸고 일제의 침략정책과 국민당의 반역행위를 폭로하는 강연회, 웅변대회, 성토대회를 연이어 열었다고 하였습니다. 길림육문중학교의 반동교원들과 우익청년학생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투쟁을 진행하여 동맹휴학 하며 목적을 달성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청년학생들이 자신과 학생운동 지도부를 더욱 믿고 따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동맹휴학에서 얻은 성과를 총화하고 앙양된 청년학생들의 기세를 보다 큰 규모의 적극적인 반일투쟁에로 조직 동원할 준비를 하였다”는 황당한 역사왜곡에 이어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을 조직영도한 자신의 업적에 대해 나열하였습니다.

회고록에서 “1928년 10월 26일 새벽에 길림의 거리들에 삐라를 뿌리고 격문을 붙였고 아침에는 학생들이 약속된 시간에 일제히 교정에서 모여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성토문을 발표한 다음 가두시위에 들어갔다”고 적혀있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아는 미술작품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시위투쟁을 조직영도하시는 김일성동지'가 생각날 것입니다. 이 미술작품에서도 김성주가 시위투쟁을 선두에서 조직지도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거리는 삽시간에 수천 명의 학생들로 차고 넘치였고 그들은 <일제침략자들을 타도하자!>, <일제의 길회선철도부설공사를 반대하여 투쟁하자!>는 한글로 된플래카드와 <타도일제>, <타도매국노>, <회수길회선>이라고 중국글로 쓴 플래카드들을 들고 거리를 누비면서 시위투쟁을 진행했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상당한 역사왜곡을 했다면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는 여기에 가세해 더 황당한 거짓말로 북한주민들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노동당 선전선동부가 운영하는 인트라넷인 김일성방송대학과 강연제강들에선 김일성이 “길회선철도부설공사의 침략적이며 약탈적인 목적을 놈들의 상품침투행위와 밀접히 결합시켜 청년학생들과 군중에게 인식시킴으로써 그들이 일제에 대한 증오심으로 끓어 번지게 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리고 직접 시위투쟁대오를 편성하고 각 대오의 책임자들을 임명하였으며 시위준비를 철저히 갖추도록 했다며 청년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을 보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는 1928년 11월 2일호 '길돈선연장 기타로 길림 배일험악화(排日險惡化), 학생 등은 매일 시위행렬계속, 천진배일도 수일 심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으나 여기에서 김성주라는 이름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3일호 동아일보에도 '할빈학생단체 길회선반대고조, 9일 경관대와 충돌, 148명 부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으나 김성주나 조선청년들의 시위활동에 대해서는 역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회고록에서 한 가지 더 주시해 볼 수 있는 것은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을 통해 일제의 침략에 겁을 먹고 도망칠 궁리만 하던 사람들도 10대, 20대의 청년학생들이 자기들로써도 엄두를 낼 수 없는 큰일을 하는 것을 보고 인식이 달라졌다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당시를 목격한 체험자들의 증언은 “길회선철도부설이나 중동철도사건은 공산당의 사촉을 받은 자들이 소련을 옹호하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진행한 시위투쟁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공산당을 매국노라고 욕했으며 소련을 지지하는 삐라를 뿌리는 일은 대부분 중학생들이 한 짓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동북지방의 철도를 놓고 중국과 소련, 일본이 서로 이권싸움을 하는 과정에 중국 동북군 8천여 명이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기에 중국경찰들도 소련에 대해 치를 떨고 있던 상황에서 이렇게 소련을 옹호하는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진행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진위는 당시에 일단 시위투쟁에 참가한 현장은 물론 제보를 받고 시위에 참가했다고 하는 학생들에 대해서 중국경찰은 중학생은 물론 소학생들도 모조리 잡아서 감옥에 넣었기에 김일성도 길림감옥에 체포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공산주의 성향의 중국 청년들과 일부 조선청년들이 소련을 지지하여 벌인 투쟁으로, 시위의 조직지도부는 중국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이었으며 16살의 조선소년 김성주는 주동이 아니라 피동이 되어 시위학생들 속에 끼어있던 평범한 중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세기와 더불어는 그래서 거짓으로 왜곡된 도서라는 점을 청취자 여러분들은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