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규 前 평화자동차 이사

서울-노재완 nohjw@rfa.org
201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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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고양시 일산에서 만난 김선규 전 평화자동차 총괄이사.
지난 18일 고양시 일산에서 만난 김선규 전 평화자동차 총괄이사.
RFA PHOTO/노재완

MC: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교류와 사람들> 시간입니다. 진행에 노재완입니다. 지금은 사업을 접었지만, 2012년까지 북한에서는 남측의 평화자동차와 북측의 조선민흥총회사가 손을 잡고 자동차 사업을 벌였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평화자동차총회사입니다. 북한의 유도 영웅 계순희가 이 회사의 옥외 광고판에 나오기도 했는데요.

평화자동차총회사는 당시 남북 합영회사였기 때문에 남한 사람도 평양에 상주해 경영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특히 오늘 만나게 될 김선규 전 평화자동차 총괄이사는 5년이 넘는 시간을 매일같이 평양과 남포를 출퇴근하며 보냈습니다. 김 전 이사가 어떤 일을 하며 그렇게 오랫동안 평양에 머물렀는지 이 시간을 통해 직접 들어보시겠습니다.

기자: 이사님, 안녕하세요?

김선규: 네, 안녕하세요.

기자: 평화자동차 사업은 정리됐는데요. 오랫동안 이 회사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아쉬움이 클 것 같습니다.

김선규: 왜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많은 시간을 북쪽에서 보냈고, 또 북쪽 사람들과도 정을 나눴던 그런 곳인데, 당연히 아쉽고 그렇죠.

기자: 남한 사람으로는 가장 오랫동안 북한에 체류했다고 들었는데, 북한에는 총 몇 년 계셨습니까?

김선규: 평양에 체류한 것만 따지면 2001년부터 약 5년입니다.

기자: 북한 평화자동차에서는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김선규: 평화자동차 남포공장을 지을 때 관리 감독을 했고요. 또 지금 보통강호텔 앞에 있는 세계평화센터도 건설할 때 관리 감독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평양시 6곳(평양역, 순항공항, 청년호텔 등)에 평화자동차를 홍보하는 대형 광고판을 세우는 일도 제가 직접 했습니다.

기자: 남한 사람은 북한에서 최대 몇 개월간 체류가 가능하나요?

김선규: 저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남한 사람이 북한에 체류하게 되면 길어야 1개월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북한 법률에는 최대 3개월까지 가능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3개월 정도 체류하고 잠깐 출국했다가 다시 비자를 받고 3개월 근무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단수 비자를 받고 다녔는데요. 나중에는 북측에서 편리를 봐줘서 복수 비자를 받기도 했습니다. 남한 사람에게 이러한 편리를 봐준 것은 아마도 저희 평화자동차가 유일한 것입니다.

기자: 연락도 잘 안 되는 북한에서 그렇게 오래 계시면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은데, 혹시 장기 체류에 대한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김선규: 네, 물론 걱정을 많이 하죠. 가족뿐만 아니라 저를 아는 모든 분이 걱정을 많이 해주셨는데요.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의 처가가 이산가족입니다. 처가가 북쪽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지 제가 북쪽에서 근무하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셨고, 오히려 잘하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편안하게 근무할 수가 있었습니다.

기자: 북한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숙식은 어떻게 하셨고, 아플 때 병원 같은 데도 자유롭게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선규: 저 같은 경우 평양에 있는 보통강호텔에 있었기 때문에 숙식은 크게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플 때는 북한 안내원들과 함께 평양친선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그랬습니다. 참고로 평양친선병원은 북한주재 외교관들을 비롯하여 북한에 오는 외국인들과 해외동포들에 대한 치료사업을 해주는 곳입니다.

기자: 남한 사람도 북한에서 직접 자동차를 몰 수 있습니까?

김선규: 북한에도 면허 제도가 있어서 면허증이 없는 사람은 운전할 수가 없습니다. 저 역시 북한 면허가 없어 마음대로 운전할 순 없었고요. 다만 저희가 만든 자동차를 시승하기 위해서 주로 공장 안에서 잠시 운전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평양에서 남포로 출근할 때 운전사의 양해를 구해 잠깐잠깐 운전한 적이 있습니다.

기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남한 사람은 북한에서 운전할 순 없는 거군요?

김선규: 네, 그렇습니다. 원칙적으로 남한 사람은 북한에서 차를 몰 수가 없습니다.

기자: 북한에 있게 되면 남한 사람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 했던 의무 사항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게 있었나요?

김선규: 의무 사항이라기보다는 주의해야 될 사항이죠. 이를테면 일반 북한 주민들과 직접 접촉을 한다든가 쓸데없이 대화를 나누는 일은 해선 안 됩니다. 그리고 또 간첩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그런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진을 허가 없이 마음대로 찍는다든가 또는 가지 말아야 할 곳에 혼자서 간다든가 하는 것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북한에 가면 이런 것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기자: 그럼에도 생활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김선규: 물론이죠. 주의한다고 했지만, 가끔 그런 실수가 생깁니다. 여러 일화가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3개월간의 체류가 끝나 잠시 2주 정도 남한에 갔다가 온다고 북측 접대원에게 얘기하자 그 사람이 놀라는 표정으로 저한테 그렇게 오래 있다가 옵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그만 저도 모르게 경솔하게 웃었습니다. 2주 정도면 되게 짧은 시간인데 그들한테는 제가 마치 자기네 사람이 2주간 해외에 출장을 다녀오는 거처럼 길게 느껴졌나 봐요. 그러니까 그들도 제가 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 착각하고 저한테 그런 말을 했던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것은 큰 사건이었는데요. 회의하다가 그들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에서 제가 반공화국 사람이라고 얘기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만 그게 그들한테는 공화국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돼 갑자기 묘한 분위기가 흘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 저는 곧바로 해명에 나섰죠. 내가 말한 반공화국은 반대의 의미가 아닌 절반(半)의 뜻이다. 즉, 북한에 오래 있다 보니까 나도 절반은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더니 그때야 비로소 굳었던 얼굴들이 펴졌습니다.

기자: 진짜로 그때 긴장을 많이 하셨겠네요?

김선규: 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고 식은땀이 납니다.

기자: 개인적으로 북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선규: 남포공장을 건설할 때입니다. 당시 수로 공사를 하는데 일하러 온 북한 인력들은 삽 정도만 있었지 다른 장비 없이 모든 일을 손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우리 공장에 포클레인(굴삭기)이 있어 단시간 내에 땅을 파니까 그것을 바라보던 많은 북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북한 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런 게 기억이 나고요.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보면서 노동의 가치가 단순히 힘의 논리가 아닌 머리와 기술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당시 북한 노동자들도 깨닫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통일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기자: 업무적인 게 아닌 인간적으로도 북한 사람들과 친해지고 그렇습니까?

김선규: 단지 체제가 다를 뿐 거기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만납니다. 당연히 정이 생기고 그래서 친해지기도 하는데요. 정말 겪어 보니까 북한에도 순수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자: 이산가족 상봉이 열리면서 남북관계가 조금 풀리는 분위기입니다. 경제협력도 곧 열릴 것이란 관측도 있습니다. 이 부분 어떻게 보십니까?

김선규: 죄송합니다. 민감한 정치적인 얘기는 제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다만 남북을 오갔던 사람으로서 남북 경제협력이 앞으로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기자: 끝으로 향후 바람직한 남북경협의 방향을 제시한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선규: 우리가 이미 개성공단을 통해 경험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투자자가 남쪽 경제인으로만 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기업들이 많이 들어와서 특히 북한과 가까운 중국과 러시아 기업들이 들어와서 함께 사업을 벌여야 성공할 수가 있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남북경협의 발전 방향입니다.

기자: 네, 잘 알겠습니다. 남북교류와 사람들, 지금까지 김선규 전 평화자동차 이사를 만나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이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김선규: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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