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한국 가요 ‘아침 이슬’을 듣고

워싱턴-홍알벗 honga@rfa.org
2022.12.03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한국 가요 ‘아침 이슬’을 듣고 '아침이슬' 50주년 김민기 헌정사업추진위원회가 지난해 6월 트리뷰트 앨범 '아침이슬 50년 김민기에게 헌정하다' 1차분 음원을 시작으로 매주 한 차례 4∼5곡씩 각종 음원사이트를 통해 공개됐다고 밝혔다. 사진은 '아침이슬' 녹음 참여 예술가들.
/연합

MC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홍알벗입니다. 오늘도 탈북작가 도명학 선생님과 함께 남한의 문학작품을 읽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도명학: , 안녕하십니까.

 

MC: 오늘은 어떤 작품을 소개해 주실 건가요?

 

도명학: 오늘은아침이슬을 가지고 이야기할까 합니다.

 

MC: , 이건 시나 소설이 아닌 노래잖습니까? 문학작품을 소개하는 저희 코너에서 이 노래를 고르신 이유가 있을까요?

 

도명학: , 의문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저는 노래 가사도 시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면 남한에서는 노래 가사를 노랫말이라고 하던데요. 그러니까 가사는 말이지 시는 아니다. 즉 문학작품이 아니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가사를 시문학범주에 넣습니다. 그것도 가사를 서정시의 정수라고 치켜세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가사 창작이 전업인 시인들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유명한 전동우 시인의 경우만 봐도 가사 창작이 전업이었습니다. 가사가 시에 속하니까 그만큼 가사 하나 창작하는데 품을 많이 들이는데청춘이라는 노래 가사 하나를 전동우 시인이 완성하기까지 2년이나 걸렸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가사를 쓰던 과정을 쓴 창작 수기를 읽고 감동하던 생각이 납니다. 가사의 질에 대한 요구 수준이 워낙 까다롭기에 저도 가사를 가끔 써봤지만 한편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남한에 와보니 가수가 직접 가사도 쓰고 곡도 붙이고 하는 경우가 많던데 북한에선 정말 드문 현상입니다. 가사에 곡을 붙이는 것에 비해 가사 쓰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남한에서 가사를 노랫말이라고도 하던데 저로선 난생 처음 들었죠. 말이라서 가수가 직접 쓸수 있을 만큼 쉬운 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렇지만 정말 가사가 멋있는 노래들도 많더군요. 전번 시간에 이야기 한 유명시타는 목마름으로가 노래로 각색된 것처럼 좋은 시에 곡을 붙여 만든 노래는 확실히 품격이 다릅니다. 북한에선 명가사에서 명곡이 나온다고 했는데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노래아침이슬가사도 곡을 떼고 읊으면 그냥 한편의 좋은 시이기에 들고 나왔습니다.

 

MC: 이 작품은 1970년에 한국가수 양희은의 노래로 발표됐었죠. 먼저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김민기란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도명학: , 사실 저는 김민기라는 분을 개인적으로 만나 뵌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북에서부터 이 노래를 들었기에 과연 어떤 분이 만들었는지 상당히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독특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얼굴도 한번 보고 싶었구요. 그래서 남한에 와서 알아봤더니 역시나 대단한 분이시더군요.

 

김민기, 이분은 시인은 아니고 작곡가더군요. 작곡가가 가사를 직접 써서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드는 경우가 꽤 있지만 이분이 대단한 건아침이슬과 같은 품격있는 가사들을 창작한 거죠. 이미 남한에선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분을 제가 새삼스럽게 소개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북한 청취자들을 위해서는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김민기, 이분은 1973년 초에 김지하 시인의 희곡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1974 4월에는 소리굿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 제재를 받고 상연금지 처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체포위협을 무릅쓰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공연하는 결기를 보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또 그해 10월에는 군복무를 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초 유신반대운동들에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불려진 것이 문제가 되어 조사를 받았고, 그가 지은 노래아침이슬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노래앨범도 판매금지조치를 당했습니다. 조사가 끝난 뒤에는 영창살이를 하고 최전방부대에 재배치되었는데 이때 중대장의 부탁을 받고 중대가를 작곡하기도 했답니다. 또 제대된 후 공적인 음악활동이 제한돼 미술대학 학사학위와 중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졸업 후 미술활동이나 교편을 잡지 않은 채 막노동이나 공장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며 가수 양희은의 음반에 들어갈 노래들을 작곡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음반에 작곡가명으로 가명을 사용했음에도 수록곡 중늙은 군인의 노래가 군부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또 금지곡 판정과 음반 판매 금지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비밀리에 작곡과 연주활동을 진행했는데 이때 노래극공장의 불빛을 제작했고, 노래극은 대학가에 은밀하게 보급되었습니다. 잠시 노래 ‘늙은 군인의 노래를 들어 보시겠습니다.

 

(액트: 김민기 늙으느 군인의 노래’, 유투브 채널: 손희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후에는 일시적으로 공개적인 음악활동을 재개했으나 12.12숙군쿠테타 후에는 농사를 지으며 활동을 삼갔는데, 1981년 당시 전두환 정부가 자신을 회유하려 하자 농사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습니다. 그후 1985년 결혼을 했고 1987 6월 항쟁으로 본격적인 민주화열풍이 불자 다시 음악활동을 재개했는데, 이때 6월 항쟁의 마지막 날 7 7일 서울시청광장에 서 이한열열사 추모행사에 갔는데 백만군중이 다 함께아침이슬을 부르는 것을 목격하곤 이 노래가 자신만의 노래가 아니구나 하고 느끼고 이후로는 공식석상에서아침이슬을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인간 됨을 알 수 있는 부분인 것 같은데 아무튼 대단한 분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김민기 작곡가에 대한 소개는 이 정도가 다여서 아쉬운 대로 마치겠습니다.

 

MC: 그런데, 이 노래는 1975년에 갑자기 금지곡으로 지정됐습니다. 왜 그랬나요?

 

도명학: 당시 정부의 긴급조치 9호에 의해 금지되었는데 가사가 문제 시 되었습니다. 가사에 보면태양이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른다는 구절이 있는 데 불순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불길하게 묘지 위에 태양이 떠오르느냐는 거였습니다. 이 구절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붙였지만 가장 과격한 해석은위대한 인민의 지도자를 의미하는 태양은 김일성이고, 혁명가들의 시체들을 넘고 넘어 공산주의 붉은 낙원이 온다는 의미라고 엮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공산주의를 갈망하는 내용까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당시의 한국사회가 그런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MC: 그럼, 함께 노래를 들어 보시죠

 

<<<<노래: 양희은 >>>>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태양은 묘지위에

붉게 타오르고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출처: 양희은, ‘아침이슬’, 유투브 채널: 용재천사)

 

MC: 노래도 노래지만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정말이지 문학작품처럼 감동을 주는데요. 문학작가의 입장에서 이 노래의 가사를 어떻게 보십니까?

 

도명학: 아주 비장하면서도 결연한 투쟁 의지를 간결하고 상징적인 표현수법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 8행 밖에 안되는 짧은 가사에 엄청난 무게의 의미를 손색없이 실어냈다는 점에서 예술성이 높습니다. 이런 가사는 시지 노랫말이라고 한다면 격이 낮아져 안될 것 같습니다.

 

MC: 남한에서 한창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때 이 노래가 참 많이 불렸는데요. 그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도명학: 당시 민주화를 열망하며 거리에서 최루탄에 맞아가며, 감옥에 끌려가 고문받는 상황이었으니까 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비장함과 결연한 의지가 속에서 꿈틀거렸을 것입니다. 거기다 합창으로 부르면 노래가 주는 힘이 더 커지고, 그래서 제가 보기엔 금지곡이 될만한 이유가 충분한 노래였던 것 같은데, 그래도 작곡가가 죽임을 당하거나 무기징역 같은 형벌까지 받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유신정권이 아무리 독재정권이었어도 김일성정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MC: 북한에 계실 때 이 노래를 언제, 어떻게 듣게 되셨나요? 들으셨을 때 느낌은 어떠셨나요?

 

도명학: 이 노래를 처음 들어본 때가 아마 1990년대 후반 이른바 고난의 행군 때였던 같습니다. 대남선전용 음악단인칠보산음악단에서 만들어 대남방송에 내보내는 노래라며 돌고 있었는데 훗날 보니 남한에서 직접 부르는 노래더군요. 하지만 이 노래를 가장 무겁게 들었던 때는 제가 정치범으로 체포돼 수갑을 차고 가던 차안에서였습니다. 저는 절대 살아나올 수 없는 혐의로 잡혀 죽으러 가는 길인데 앞자리 조수석에 앉은 보위부 간부가 문득 카오디오에 시디를 넣고 켠 노래가아침이슬이 아니겠습니까. 보위부원들이 이남 노래를 마음대로 듣는구나, 그것도 반동분자가 듣는 앞에서 말이죠. 왜 하필이면 이자가 다른 노래도 아니고아침이슬을 켰을까, 죽음의 문턱으로 가고 있는 나를 조롱하는 장송곡 삼아 들려주는 건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건 별스레 기분이 묘해지며 속이 편한 느낌마저 들며 어차피 맞게 될 죽음인데 까짓거 죽으면 죽는 거지, 나 죽은 후에라도 이 땅에 민주주의는 올 거라는 어쩌면 객기에 가까운 확신이 생기더군요. 그래선지 지금도아침이슬을 들으면 그 때 느꼈던 기분과 그 노래를 틀어준 보위부 간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MC: 이 노래를 북한 주민들이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도명학: 제가 북한을 떠나기 전에도 이 노래를 듣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세월이 많이 흐르고 북한간부들과 주민들 생각도 많이 변한 만큼 아마 날이 갈수록 더하지 않을까요. 드러내고 말은 못하지만 속으론 이 노래의 의미를 생각해보며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MC: 이 노래가 북한 주민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요?

 

도명학: 변화는 하루 이틀에 오는 건 아니지만 어느 날에는 가는 오래전 서울시청광장에서 백만군중이 불렀듯 김일성광장에서 백만군중이 부를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노래 한 두편으로 당장 눈에 뜨이는 변화를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간부들과 인민들 마음을 적실 것입니다. 그것이 문화예술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MC: 이 노래는 남한에서도 금지곡이었을만큼 지도부가 예민하게 반응했던 곡인데 북한 당국에게도 이 노래는 껄끄러운 부분이 있겠죠?

 

도명학: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이미아침이슬이 북한에서 금지곡이 된 지 오랩니다. 사실 처음엔 그 노래가 비공개 노래임에도 칠보산음악단 노래로 소문이 난만큼 별로 처벌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대량 아사로 체제가 위협받자 당국이 스스로 그 노래가 남조선 노래라며 금지곡으로 지정해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만큼 두려움을 느꼈다는 얘기죠.

 

MC: 끝으로 전체적인 감상을 말씀해 주시죠.

 

도명학: 앞에서 여러 가지로 말씀 드렸기 때문에 감상보다는 저의 바램을 얘기 하고 싶습니다. 저는 남한 운동권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들이 북에 더 많이, 아니 폭우가 쏟아지듯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한때는 그 노래들이 남한에 필요 했지만 지금은 북한에 필요합니다. 방송으로도 전해지고 다양한 미디어 매체로도 들어가고 해서 당국이 정신 차릴 새 없는 환경을 만들어버리면 처벌도 느슨해질 수밖에 없고, 오히려 단속해야 할 입장에 있는 간부들부터 듣고 변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남한노래 가사를 주민들 스스로 북한 실정에 맞게 개사해 부르기도 하고 나중엔 북한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작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들도 나올 것입니다. 특히 북한청소년들은 원래부터 노래 가사를 왜곡해 부르거나 개사해 부르길 좋아해 당국이 통제해왔지만 별 효과 없었습니다.

 

MC: , 도명학의 남북문학기행, 오늘 순서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도명학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도명학: , 고맙습니다.

 

MC: 함께 해 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 드립니다. 저희는 다음 주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기자: 홍알벗, 데스크: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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