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 음력설 가득 해놓은 음식을 저희들한테 이제 꺼내주더라고요. 맛있게 먹었죠. 잘 먹고 나니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하더라고요.
김주찬: 현실적으로 어렵다 생각해서 결국 혼자 여동생을 버리고 넘어갔어요. 진짜 오빠가 꼭 올 테니까 절대로 너 거기 3일만 버티고 있어라 그래버리고 그냥 무작정 두만강으로 뛰어들었어요.
마순희: 정말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그리고 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면서 내일 저녁에 나는 저 별을 어디에서 어떤 마음으로 올려다 볼까?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예진입니다. 탈북민들은 이제껏 귀순자, 북한이탈자, 새터민,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등 시대마다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바뀌어 온 호칭만큼이나 국가와 사회, 사람들에게 다른 대접을 받아왔죠. 30년 전까지만 해도 간첩 취급을 받던 탈북민들, 지금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쯤 되는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사이 탈북민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탈북부터 한국정착까지, 그동안 털어놓지 못했던 그들의 속얘기를 들어봅니다.
김은주: 밤새 산에서 기다렸어요. 경비를 서고 나면 새벽에 이제 교대하기 전에 제일 피곤할 때, 새벽 4시 5시쯤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이제 앞장서서 이제 가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음이 와장창 깨지는 거예요. 그래서 물에 빠졌어요. 순간 너무 무서워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뒤돌아서서 막 나왔거든요. 근데 나와서 생각해 보니까 발이 땅에 닿았던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엄마, 언니랑 우장창창 얼음을 깨면서 그 지류를 건너서 건너자마자 이제 추우니까 이 바지가 위까지 다 젖었어요. 이 무릎 위까지 젖었는데 이게 바지가 꽁꽁 얼더라고요. 로봇처럼 직진 보행하듯이 다리를 이렇게 이런 식으로 걸으면서 옥수수 밭을 건너서 일단 산으로 숨어들었어요. 그래서 산에서 불을 지펴서 옷을 말린 다음에 이제 밤에 어슥어슥해져서 누구의 집을 이제 문을 두드렸어요. 그쪽은 이제 조선족, 한국말 할 수 있는 조선족들이 많이 살다 보니까 저희를 그래도 들어오라고 하면서 그때 마침 설날이었거든요. 음력설 가득 해놓은 음식을 저희들한테 이제 꺼내주더라고요. 맛있게 먹었죠. 잘 먹고 나니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하더라고요.
대다수 탈북민들이 건너 온 두만강은 강폭이 그리 넓지도, 수심이 그리 깊지도 않은 데다 겨울엔 얼어붙어 건너기 쉬워지면서 탈북 경로로 많이 이용됩니다. 하지만 은주 씨 경우처럼 얼음이 깨지면서 살을 에는 듯한 물살을 가르며 어렵게 탈출하기도 하죠. 그렇게 탈북에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은주 씨의 현실은 겨울 추위만큼이나 냉혹했네요. 두 차례나 강제 북송을 당하고도 탈북을 감행한 김주찬 씨는 생애 처음 탈북했던 그 날의 일로 지금도 동생에게 큰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김주찬: 이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야겠다. 그래서 그때부터 매일 한두 번은 며칠 동안을 두만강에 나가서 두만강 건너가려고 여러 번을 시도했거든요. 그리고 어떻게든 여동생은 좀 데리고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물에 뛰어들 때마다 여동생을 데리고 뛰어들었는데 여동생이 막 물에 떠내려간 적도 있고, 휩쓸려서 둘 다 막 굴러간 적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그게 현실적으로 어렵다 생각해서 결국 혼자 여동생을 버리고 넘어갔어요. ‘진짜 오빠가 꼭 올 테니까 절대로 너 거기 3일만 버티고 있어라’ 그래버리고 그냥 무작정 두만강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러고 중국으로 들어와서 저 같은 아이들을 이렇게 보호하면서 공부도 시키고 하는 데를 들어갔는데 공부시켜준다는 말에 그냥 모든 생각이 안 들었어요.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지냈는데 한달 지나니까 밥 먹는데 눈물이 숟가락이 뚝뚝뚝 떨어지는 거예요. 밥을 못 넘기겠는 거예요. 두고 온 동생에 대한 죄책감… ‘얘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후회되기 시작하는데 ‘북한 가야지, 나 이대로는 아무래도 못 살 것 같다’ 그래가지고 그분들이 돈을 줘서 그거를 여기저기 숨기고 그렇게 준비해가지고 두만강으로 다시 나갔거든요. 국경으로 갔어요. 북한으로 넘어가려고. 근데 정작 두만강 앞에 갔는데, 근처로 가니까 두려움이 오기 시작하는데 다시 그곳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엄청난 공포가 밀려오면서 게다가 눈도 많이 와서 못 간다지, 그럼 못 가겠구나 뭐 이러면서 돌아섰는데 그 뒤로는 결국은 그런 시도도 한 번 못해보고 거기서 살게 됐죠. ‘제발 살아만 있어라’ 뭐 그런 생각으로 살았어요.
한국에선 탈북민들을 또 하나의 이산가족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북한에 남은 가족들과 기약 없이 떨어져 살아야 하기 때문이죠. 가족과 떨어져 살 수 없어 부모나 자식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마순희 씨처럼요.
마순희: 처녀 총각 때 우리 집에 잘 드나들던 삼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삼촌이 계속 우리 집에 그냥 오면서 산에 가서 나무 하면 같이 가 도와주고 하면서 중국 얘기를 계속 하는 거예요. 우리 정선이 일주일 동안 딱 그렇게 시간 나서 그 삼촌하고 어떻게 만나서 얘기했나 봐요. ‘맏딸이라는 게 네가 들어가서 일주일 동안만 벌면 집 앞에 자그마한 매대라도 해놓으면 온 식구 편하게 살겠는데’ 그러니까 얘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그 삼촌 따라서 간 거예요. 그때 막지를 못했어요. 내가 걔를 막아서 뭘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그렇게라도 가서 뭘 벌어오겠다’ 그러는데 어떻게 해요? 지금 안 벌어오면 채찍질해서 정말 어디 가서 뭘 벌어오라고 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래 기다렸는데 일주일째 되는 날에 걔가 도저히 올 수가 없다고 편지를 보낸 거예요. 그래서 뭐 지체하고 어쩌고 할 새도 없이 그날 밤으로 짐을 다 정리하고 작은 딸들한테 ‘엄마가 언니 찾으러 가는데 어떡할래’ 하니까 둘째도 그래, 막내도 그래 다 같이 간다 해서…
한옥정: 엄마가 언니 찾으러 가는데 엄마 혼자 보내면 안 되니까, 그러다가 또 엄마까지 우리 손을 놓을 수 있으니까, 놓칠 수 있으니까 엄마 없이 저희는 자신이 없어서 그냥 엄마 따라 그냥 따라나선 거죠.
애초 탈북이 아니라 돈 벌러 중국으로 떠난 딸을 찾으러 두만강을 건넌 마순희 씨, 하지만 그 날의 선택으로 고향 땅도, 형제자매들도, 어머니 산소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줄 몰랐던 그녀는 지금도 가슴 먹먹하기만 합니다.
마순희: 탈북할 준비가 아니라 딸 데리러 갈 준비를 한 거죠. ‘딸 데리고 무조건 건너오자’ 그날 밤에 12시까지 두만강변에서, 그 버들 숲에서 숨어서 정말 멀리서 불빛이 보이고,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막 이런 거 보면서 그때 정말 가슴을 치게 되더라고요. ‘정말 내가 언제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그리고 하늘의 총총한 별을 보면서 내일 저녁에 나는 저 별을 어디에서 어떤 마음으로 올려다 볼까’ 떠날 때에는 그냥 내 딸을 찾는다는 마음에 다른 선택을 할 그런 겨를도 없었어요. 그래서 왔는데 지금 와서 이렇게 영원히 못 갈 줄 알았더라면 정말 떠나는 걸 하루, 이틀 미루고서라도 아 형제들 한 번씩 얼굴이라도 봤을 걸, 어머님 산소에 한 번이라도 더 올라 가봤을 걸 그런 후회가 많이 되죠.
목숨 걸고 국경을 건넜지만 중국에서도 여전히 망망대해 속에 있는 듯한 탈북민들, 중국에선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라디오다큐 나는 탈북자>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