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풍당당, 전남협회장 장춘복 씨(1)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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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탑승 가능 고속버스 시승 행사에 참여한 장애우가 휠체어에 탄 채 리프트를 이용해 버스에 탑승해 안전 장치를 고정하고 있다.
휠체어 탑승 가능 고속버스 시승 행사에 참여한 장애우가 휠체어에 탄 채 리프트를 이용해 버스에 탑승해 안전 장치를 고정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사람은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에게 끌린다고 해요. 사람이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거침없이 나를 표현할 때라는 거죠. 모든 아기가 예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은데요. 왠지 끌리는 사람이 있죠. 있는 그대로의 모습, 꾸밈없이, 거침없이 당당하게 드러냈을 뿐인데 빨려들 듯이 마음이 끌리는 그런 사람이요. 오늘의 주인공이 바로 그런 사람 아닌가요?

마순희: 네. 오늘의 주인공, 한국장애인문화관광진흥원 전남협회장 장춘복 씨가 바로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춘복 씨가 몸담고 있는 곳이 장애인과 관련된 곳인데요. 한국에 와서 제가 제일 많이 놀라웠던 현상들 중의 하나가 북한과는 너무 다른 장애인들의 모습입니다. 북한의 경우 대도시에는 장애인들의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거든요. 지방으로 보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격리시키더라고요. 제 친구가 키가 특별히 작았는데 그 친구를 먼 쑥섬 같은 곳에 격리시켰던 기억이 납니다.

특별히 나라에 큰 공헌을 하다가 장애인이 된 영예군인들이나 공로자들에게는 특별한 대우가 있었지만 일반인들에겐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불편해도 우리가 흔히 보는 휠체어, 북한에서는 삼륜차라고 하거든요. 그걸 바랄 형편이 못 되고요. 더구나 장애인들이 당당히 무대에 서거나 큰 행사를 하는 것은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까 장애인들을 위한 휠체어는 물론이고 계단 옆에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통로가 따로 있어서 이동에 불편이 없더라고요. 심지어 버스를 탈 때에도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보조 발판을 내려주던데 그런 모습이 저에게는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김인선: 장애인들이 휠체어를 탄 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오를 수 있도록 차체 바닥이 낮은 저상버스가 운행되고 있죠.

마순희: 네. 시각장애인을 위한 장치도 있더라고요. 도로의 건널목마다 음성으로 안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놀랐던 기억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장애인들도 일반 사람들만큼은 아니어도 하고자 하면 많은 걸 누리고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오늘의 주인공 장춘복 씨는 장애인들이 관광과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전국적인 조직이 있는데 춘복 씨는 그 조직의 전라남도 협회장을 맡고 있는 거죠.

김인선: 이렇게 높은 직책을 맡을 정도면 대단한 인물일 것 같은데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여수시 화정동 일대의 지인들은 모두 그녀를 우리 회장님이라고 부르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늘 회장님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춘복 씨는 탈북민들의 대모로 든든히 자리 잡고 있는데요. 직접 만나보니 그 자신감과 활동성에 큰 감동을 더 받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부터 장춘복 씨는 인민위원회 법무부장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꽤 유복하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7형제 중의 막내로 자라다가 군대에 입대하여 군사복무하면서 입당도 하고 제대할 정도였으니까요. 다시 고향으로 왔을 때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었지만 아버지 덕에 풍족하지는 못해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아버지 직책도 그렇고 집안이 꽤 좋았으니 부족함 없이 지냈네요. 그러고 보면 요즘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 가운데 북한에서도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있었는데도 나오신 분들이 꽤 많으신 것 같아요.

마순희: 네. 저마다의 사연이 있겠지만 춘복 씨의 경우 7형제 중에 하나뿐인 아들만 챙기고 막내딸인 자신은 늘 소외시키는 것 같은 어머니 때문에 불만이 컸다고 합니다. 몇 년 동안 군사복무하느라 집과 떨어져 있다가 제대되어 왔는데도 어머니는 늘 아들 생각뿐이고 제대한 막내딸에게는 여전히 소홀해서 집을 떠난 거죠. 맏언니네 집에 얹혀살아 보기도 했지만 다 같이 어려운 때라 그것도 쉽지 않았고 다시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데요. 여기서도 저기서도 환영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던 2006년에 중국에 가자고 하는 친구가 생겼고 무작정 두만강을 건넜답니다.

김인선: 중국에 친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국 장춘복 씨도 인신매매로 팔려갔나요?

마순희: 그렇죠. 보통의 탈북여성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북한으로 나갈 수 없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당원인 자신이 탈북해서 중국에 갔었다는 것도 큰일인데 아버지가 간부로 계시니까 자신이 중국에 간 것이 알려지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인신매매하는 사람들에게 될수록 국경에서 먼 곳으로 보내달라고 말했고 결국 중국 내륙 쪽의 산골, 한족동네에서 살게 됐습니다.

김인선: 당사자에겐 굉장히 힘든 일이었겠지만 탈북계기나 그 과정이 솔직히 말하면 ‘부잣집 막내딸의 반항’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래도 살기 위해서 탈북하신 분들이 많으니까요. 38살에 탈북한 춘복 씨, 중국에서는 적응을 잘 하셨을까요?

마순희: 말을 모르기도 하고 나돌아 다니다가 단속에라도 걸릴까 봐 거의 2-3년을 집안에서만 지내오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수없이 많이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오기 비슷하게 탈북을 하고 다시는 고향생각을 안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간절해지는 것이 고향생각이고 식구들 생각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흔히 돌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아남을 사람이라는 말처럼 춘복 씨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말도 모르는 한족 동네였지만 2-3년 지나 어느 정도 말을 익힌 다음부터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 정도 반찬가게에서 일을 하게 됐다는데요. 하다 보니까 자기가 직접 반찬가게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시집에서는 무척이나 반대를 했지만 춘복 씨는 이미 마음을 먹은 거죠.

김인선: 보통 탈북여성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시집에서 일을 더 시키거나 돈을 벌어오라고 했다고 하던데.. 장춘복 씨의 경우엔 장사해서 돈을 벌겠다고 했더니 오히려 반대를 했다고요? 중국으로 팔려 가긴 했지만 남편복, 시댁복이 있었던 거 아닌가요?

마순희: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해요. 일반적으로 탈북여성들을 인신매매하는 브로커들을 통해서 소개받은 거잖아요? 아니 거금을 브로커에게 주었으니 샀다고 말해야 되겠지요. 일종의 자신의 재산이라고 생각도 할 수 있는데 만일 시내에 나돌아 다니거나 동네에서라도 장사를 하다가 걸려서 잡혀가는 경우에는 벌금도 내야하고 최악의 경우에 북송이라도 되는 날에는 더 큰일이거든요. 춘복 씨가 그 당시 중국에 살면서 두 딸을 낳아서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겠지요.

북송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북한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파출소, 북한에서는 분주소라고 했거든요. 파출소에서도 잡아가고 벌금을 받는 등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거든요. 그러니 돈 얼마 버는 것보다 안전을 더 중시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지만 춘복 씨는 남편이나 시댁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찬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워낙 솜씨가 좋아서 장사가 무척 잘 됐답니다. 반찬장사로 돈을 많이 벌게 되자 슈퍼라고 하는데 동네에 있는 작은 상점이거든요. 그 슈퍼도 하고 나중에는 식당도 차리게 됐다고 해요. 돈을 많이 벌어서 남편 오토바이까지 사 주었다고 하니 대단한 거죠.

김인선: 그만하면 중국에서 풍족하게 잘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은데요. 지금은 또 한국에서 지내고 있어요. 충분히 살기 좋았던 중국을 떠나 한국행을 결심한 장춘복 씨의 사연은 뭘까요?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마순희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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