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기사, 유금단 씨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18-04-19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탈북 후 남한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대형 버스를 운전하는 유금단씨.
탈북 후 남한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대형 버스를 운전하는 유금단씨.
사진-연합뉴스 제공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김인선: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그동안 여러 언론에서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분을 드디어 ‘성공시대’에서도 소개하게 됐습니다. 저도 이분, 탈북여성 1호 버스운전기사를 취재하고 싶었는데 못 만나서 아쉬웠거든요.

마순희: 그러셨군요. 오늘의 주인공 유금단 씨는 저랑 한 동네에 살고 있어서 가끔 만나기도 하는데요. 우리 양천구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답니다. 탈북 여성으로는 드물게 버스 운전을 하다 보니 여러 언론사에, 신문기사로는 물론이고 텔레비죤에도 나왔고 또 요즘은 남북하나재단의 공익광고에도 나오다 보니까 탈북민 중에서도 유명인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며칠 전에 금단 씨랑 함께 동네 사우나에 갔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금단 씨를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더라고요. 금단 씨의 인기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답니다. 금단 씨는 버스 운전 경력만 13년으로 이제는 고수가 됐는데요. 오늘도 벚꽃이 눈꽃처럼 흩날리는 도로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을 것 같네요.

김인선: 네. 양천구에 가서 그 버스를 타고 싶은데요.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까 금단 씨가 2005년도부터 운전을 했다는 말 이잖아요. 요즘에야 대형 버스기사 중에 여성 운전자가 많긴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 운전자가 많지 않았잖아요.

마순희: 그렇죠. 지금은 가끔이라도 여성운전자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때에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여성버스기사라는 직업 자체가 매우 드문 때였습니다. 지금도 탈북 여성 운전자는 제가 보기에 흔치는 않거든요. 금단 씨가 정착을 시작할 때는 2002년이었는데 버스 기사로 근무한 것은 2005년경부터라고 합니다. 운전을 하려면 면허가 있어야 하잖아요. 자연스럽게 면허 시험 얘기가 나왔는데요. 제가 운전면허를 딸 때 필기시험은 첫 번에 합격했지만 실기시험은 여섯 번 만에야 합격할 수 있었다고 했더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은 필기시험도 열한 번 만에야 합격했다면서 크게 웃더라고요.

김인선: 11번 만에 합격이요? 사실 그 정도면 포기할 법도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면허증이 꼭 필요 했을까요?

마순희: 그렇죠. 살기 위해서는 필요하죠.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금단 씨는 굉장히 무기력한 상태였다고 하는데요. 가족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으니 정착 초반엔 그저 외롭다는 생각만 들더랍니다. 그렇게 3년 정도를 지냈는데 어느 날, 가족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결국 8살 때 헤어진 아들을 11살에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금단 씨는 건설 현장이나 식당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는데요. 그렇게 하기 보다는 장사를 하면 더 많이 벌 수 있겠다 싶어서 1톤 트럭을 장만해 땅콩 장사를 하는 노점상을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노점상을 하는 동안 지나가는 버스와 버스기사들이 그렇게 멋져 보였고,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도전을 한 거죠. 그래서 대형면허를 따고 버스 기사에 도전하게 됐는데 쉽지는 않았다고 해요.

김인선: 그러니까 그동안 없었던 꿈이 생긴 거네요.

마순희: 그렇죠. 돈을 더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린 아들 앞에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거죠. 아마도 1톤 트럭을 타고 장사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버스 기사인 엄마의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고요. 그래서 1톤 트럭을 몰고 다닌 경력이면 버스기사가 되는 것이 힘들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도 있었고. 그런데 정작 버스기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습니다. 버스기사가 되기 위해 다시 시험을 보고 대형면허 자격증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취업하는 것도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답니다. 그렇게 어렵게 마을버스 회사에 취업을 했지만 금단 씨의 체격이 크지 않다보니 아무리 의자를 당겨도 발끝이 닿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의자 등받이에 가방이던 방석이든 받치고 앉아서 까치 다리로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다리의 통증이 심해졌고 지금도 금단 씨의 다리에는 계란만한 알통이 박혀 있답니다. 또 운전을 하다 보니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었다며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는 금단 씨였는데요. 그렇게 마을버스 회사에서 경력을 쌓은 뒤에 시내버스 회사로 옮겨서 지금까지 버스기사로 지내고 있습니다.

김인선: 조금 전에 사고 얘기도 잠깐 나왔는데요. 마을버스부터 시내버스까지 13년간 운전을 하다 보면 여러 일들이 많았을 것 같아요.

마순희: 그렇죠. 마을버스 운전을 하다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갑자기 신호위반으로 달려오는 대형트럭과 충돌사고가 일어났었죠. 본인이 혼자만 잘 지킨다고 해서 사고가 안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 아찔한 순간이 있었는데 1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 들어도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다행히 사고 당시 손님들은 크게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 그 일로 금단 씨는 장 파열로 수술을 받기도 했으니까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어려움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내버스운전 10개월에 환경문화상을 받던 기쁨도 있었고요. 또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서 대통령과 함께 오찬을 하는 영광도 지녔고 또 어느 해 설날에는 서울시 타종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답니다. 금단 씨가 받은 대통령상, 통일부장관상, 환경문화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들이 금단 씨의 노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즘도 가끔은 금단 씨가 운전하는 버스를 타게 되는데요. 깔끔한 제복에 항상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는 모습이었습니다.

김인선: 금단 씨가 어떤 모습으로 운전을 하는지 제 머릿속으로도 그려지는데요. 그런데 운전을 하다보면 성질 더러워진다고 할 정도로 참아야 할 일, 위험한 일도 많잖아요. 특히 남자 기사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운전사가 되기까지 금단 씨만의 남다른 철학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마순희: 네. 오늘이 어렵더라도 내일을 위해서 참고 노력하자는 것이 금단 씨의 생각인데요. 그것은 아들을 키우는데도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금단 씨는 11살 때 데려 온 아들을 한국사회에 더 잘 적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힘들더라도 대안학교에 보내지 않고 정규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성공과 행복도 중요하지만 누구나 자식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체격이 작고 소심하던 아들이 지금은 170이 넘는 건장한 체력의 청년으로 자랐어요. 그리고 서울에 있는 유명대학의 경찰학과 4학년 재학 중입니다. 얼마 전에는 호주에 어학연수까지 다녀왔다는 멋진 아들이 앞으로 경찰공무원이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입니다. 유금단 씨는 성공이 별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토록 원하던,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하고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인정을 받고 있고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효심이 남다른 아들까지 잘 성장해주고 있기때문에 자신이 성공적인 정착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앞으로도 금단 씨가 쭉 행복하고 보람찬 나날을 보내기를 저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김인선: 네. 금단 씨의 앞날을 저도 함께 축복하겠습니다. 오늘은 버스기사, 유금단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행복을 위해선 꿈을 갖고 도전해야 한다는 그 말, 탈북민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탈북민들의 성공과 그 기준에 대해 들어보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지금까지 여기는 서울. 김인선이었습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