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힘이다, 무역전문가 정동훈 씨 (1)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2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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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ol_store.jpg 사진은 서울 청계 3가 인근의 공구 상점들.
사진-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몸과 마음이 점점 더 움츠러들고 있습니다. 추워진 날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잠시 정상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한국에선 다시금 코로나비루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요. 3차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거리두기도 강화되고 학생들의 등교 일수는 또 다시 축소됐습니다. 다시 한 번 사회활동이 줄어들게 되어 경제 위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데요. 다행인 건 코로나 악화에도 남한 전체의 무역거래는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그나마 무역업에 종사하신 분들은 코로나와 무관하게 바쁘다는 얘긴데요. 탈북민들 중에서도 무역업을 하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마순희: 네. 저도 정확치는 않은데요. 우리 탈북민들 중에서 무역업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생각할 때에 무역업이라고 하면 특별한 사람, 즉 국가적으로 다른 나라와의 무역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거든요. 그만큼 북한에서는 외국에 자유롭게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적이었으니까요. 일반 사람들은 북한 내에서의 여행도 자유롭지 못 하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죠.

 

그랬던 북한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여권만 있으면 그 어떤 나라든 자유롭게 여행이나 사업도 할 수 있게 됐으니 무역업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충분히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역업이라고 해서 북한처럼 국가적인 큰 사업만 하는 게 아니니까요.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고 들여오는 정도의 보따리 장사로부터 규모가 큰 사업을 하시는 분들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경제활동을 하는데요. 그 중에는 북한에서부터 무역업에 종사했던 분들이나 장사를 잘 하시던 분들도 있지만 뒤늦게 시작한 분들도 꽤 있어요. 한국행을 하는 동안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그 나라들의 실상을 잘 알게 되고 유통을 하면 돈벌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거든요.

 

김인선: 어떤 제품을 유통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거죠.

 

마순희: 그렇죠. 그래서 좋은 시기를 잘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유통시기에 따라 이익을 볼 수 도 있지만 때론 막대한 손해를 볼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과 같이 코로나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요즘과 같은 시기엔 사람이 직접 왕래하면서 새로운 판로를 개척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이미 전에 구축해놓은 통로나 인적자원들을 이용하여 화물로 운송하는 것은 가능하잖아요? 게다가 요즘은 개인이 움직이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워지면서 무역업자를 통해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무역사업은 더 활발해졌고 무역거래가 흑자를 기록한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무역업을 하는 분들은 많이 바빠졌는데요. 오늘 소개해드릴 정동훈 씨 역시 그런 분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이번 성공시대 주인공은 무역업을 하시는 분이군요. 앞서 무역업을 하는 탈북민 중엔 북한에서부터 무역업을 한 분도 있지만 뒤늦게 시작한 분도 있다고 했는데요. 정동훈 씨는 어떤 경우일까요?

 

마순희: 네. 정동훈 씨는 북한에서 무역업을 했던 분에 해당됩니다. 북한에서 러시아 무역대표부에서 근무하던 분이거든요. 일반 주민들과는 달리 좋은 출신성분을 타고난 간부였다고 말할 수 있죠. 하지만 한국에 와서 뒤늦게 무역업을 시작한 사람들보다 능력이 돋보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고위층 간부일 지라도 막상 탈북하면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하기 어려워하기는 일반 탈북민들과 다를 바 없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본인이 노력해서 돈을 벌고 경쟁해야 하잖아요? 이런 체제 속에서 간부 출신 탈북민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자신감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급 내 이동이 차단된 북한과 달리 한국은 경제력, 권력, 명예, 직업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사회적 위상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정동훈 씨처럼 준비 없이 급작스럽게 한국행을 결정한 경우엔 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훈 씨의 경우 2002년 직원 4명을 데리고 러시아 무역대표부에서 근무했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절차를 지켜서 업무처리를 하면 성사가 안 되거나 이익을 남기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인데요. 러시아에서 일하면서 중국에 가서 계약을 해야 하는데 대사관에 신고하고 외교부와 중앙당을 거쳐 승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려면 한 달이 더 걸려야 했기에 승인이 떨어지기 전에 사업을 선행을 한 겁니다. 결과적으로 꽤 많은 이익을 냈지만 정동훈 씨는 이 일로 북한의 송환명령을 받게 됐고 북한에 돌아가면 어떤 처벌이 기다릴 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망명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김인선: 절차상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무역업자로서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했고, 결과적으로 꽤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었는데 설마 심한 처벌까지 내려졌겠어요?

 

마순희: 제 나라에서 법을 위반해도 처벌을 받는데 더하죠.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성과에 대한 보상이 따르지만 북한의 현실은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답니다. 성과보다 상부의 지시를 어긴 것이 더 큰 죄가 되니까요. 외국에서 외국으로,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마음대로 이동했고 결제를 받지 않고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 가거나 추방될 만큼 엄중한 처벌이 내려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별 수 없이 망명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길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내몽골로 갔었는데 경비대에 잡히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숱한 돈을 쓰게 됐거든요. 국경경비대에 잡히면 난민처리가 되기 때문에 난민수용소나 한국대사관 같은 곳에 인계되고 일이 쉽게 해결됐을 텐데 그런 정보를 모르다 보니까 안 써도 되는 외화를 다 써버린 겁니다. 이런 사연들이 있기에 정동훈 씨는 한국에 온 지 거의 20년이 다 되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신변 노출을 꺼리고 계신답니다. 그래서 현재는 충청남도의 한 지방도시에서 자그맣게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까지만 말씀드릴게요.

 

김인선: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사업가는 본능적으로 뭐가 돈이 되는지 보인다고 하거든요. 북한에서부터 무역을 해왔던 정동훈 씨는 어떤 물품에 주력하고 계신가요?

 

마순희: 정동훈 씨의 회사는 안전용품이나 공구를 비롯해서 포장용품, 사무용품 등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곳이거든요. 중국에서 물건을 싸게 사와서 한국에서 판매하는 형식도 있고 품질이 좋은 편인 한국 물건을 중국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처음 몇 년 간은 컨테이너, 말하자면 임시건물에서 가게를 운영하다가 돈을 좀 모은 후 지금의 가게로 8년 전에 이전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무역업도 탈북만큼이나 순탄치 않았습니다. 여느 탈북민처럼 정착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인데요. 가장 힘들었던 것이 정신적인 고통과 건강 악화였습니다. 외로움과 극심한 정신적 압박을 이기지 못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다 보니 십이지장 궤양이 심해졌고 알코올중독으로 간경화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어느 날 극심한 통증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깨어나 보니 3일 동안 의식을 잃었었다고 하더라고요. 담당했던 의사는 동훈 씨에게 ‘집에 돌아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라면서 치료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인선: 한 마디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셨네요. 정동훈 씨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삶의 길로 갈 수 있었는지 궁금한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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