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예년 이맘때는 벚꽃이 만개했는데요. 올해는 3월 기온이 평년보다 낮습니다. 한국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일조량은 평년 대비 70~7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일조량 부족은 농가의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에 농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탈북민들 중에도 농사짓는 분들이 여럿 계시잖아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중에는 농촌에서 농작물을 키우시는 분들은 물론 오리나 닭, 흑염소, 한우 등 가축을 키우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북한 농촌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있는 분들도 있고, 도시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귀농에 대해 관심을 갖고 농사 일에 뛰어든 분들도 계신데요. 대부분 농촌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 농촌 지역에 지원을 하는 부분도 있지만 영농을 희망하는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지원도 있어서 농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탈북민들이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사업을 지원하는 남북하나재단에서는 귀농을 희망하는 분들을 선정하여 영농정착성공패키지 교육을 2011년부터 실시하고 있는데요. 금년에도 지난 3월 6일부터 21일까지 16일 동안 진행됐습니다. 이번에 교육을 수료한 탈북민은 17명으로, 영농기술에 대한 실무교육과 영농현장 견학, 선도농가 체험 등 실용적인 교육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영농정착 교육을 받고 농촌에 정착한 탈북민은 309명으로 집계되는데요. 최근 5년간 재단으로부터 영농자금을 지원받은 탈북민의 영농정착율은 94%에 이른다고 하니 대부분 농촌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기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최근 일조량이 평년 대비 70-75%정도 된다면 농사짓는 분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긴 하네요. 하지만 토마토나 딸기, 참외 등 온실(하우스)에서 농사짓는 분들에게는 그 피해가 비교적 적게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는데요. 오늘 소개해 드릴 주인공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딸기농장을 운영하는 황수정 씨인데요. 수정 씨는 1998년에 북한을 떠나 2003년에 한국 정착을 시작해 경상남도 진주에서 현재까지 딸기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딸기의 경우 주로 온실에서 재배하기 때문에 선생님께서 예상하신 것처럼 일조량의 피해를 덜 받을 수는 있는데요. 같은 농작물로 농사 지어도 농가마다 수확량도 다르고 품질도 조금씩 다르잖아요. 또 기후에 따른 피해도 농가마다 다 다른데요. 수정 씨네 딸기농장은 어떤가요?
마순희: 네. 수정 씨네 딸기농장은 온실(하우스)농사이기 때문에 이상 기후에 영향을 거의 느끼지 못 하고 있다고 하고요. 수확물도 예년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잘 되고 있다고 합니다. 수정 씨는 올해로 딸기농사 10년차인데요. 처음엔 3동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온실(하우스)이 11동으로 늘었고 그만큼 바빠졌습니다. 요즘은 딸기 수확과 함께 새 모종 심기를 하느라 무척 바쁘게 보낸다고 하더군요.
김인선: 자영업이든 사업이든,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무엇을 할지 품목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데요. 영농 일을 시작할 때 수정 씨는 딸기를 선택했어요. 북한에서도 2010년 이후로 남새와 과일을 하우스, 그러니까 호동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는데요. 특히 딸기가 돈이 되기 때문에 딸기농사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하지만 수정 씨는 2003년에 한국에 입국했으니까 북한에서 호동 농사를 접하지 못 한 거잖아요.
마순희: 네. 온실 농사는 물론이고 논, 밭에서 하는 농사까지 수정 씨는 전혀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황수정 씨는 함경북도의 한 산간지역에서 살았지만 농사와는 무관한 전업주부로 지냈다고 합니다. 농사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달프고 가슴 아픈 삶을 살았는데요. 고난의 행군 시절 남편이 간경화로 앓다가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 하고 하늘나라로 떠났고 뒤따라 사랑하는 둘째 딸마저 먼저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눈앞이 캄캄했지만 이렇게 있다가는 나머지 두 딸마저 잃을 것 같아서 수정 씨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딸들에게 밥이라도 먹이고 싶은 마음에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 길로 딸들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남편도 생기고 그 사이에서 딸도 태어났지만 아시다시피 탈북민은 신분도 없이 숨어서 살아야 하잖아요?
수정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국을 거친 험난한 여정을 거쳐 2003년에 한국에 오게 되었고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 거주지를 배정받아 한국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가족 없이 혼자가 되다 보니 처음 1년은 몸도 마음도 힘들어서 일할 엄두도 내지 못 하고 병원에 다니는 정도로만 외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지역 자원봉사자들의 따뜻한 손길을 접하게 되었고 수정 씨는 점차 활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봉사활동에 열심히 참여하다 보니 수정 씨의 마음이 조금씩 열렸고 심적으로 회복이 된 후에는 비슷한 처지의 탈북민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수정 씨의 경우 2006년부터 중국에서 숨어 사는 탈북민들을 취재하는 봉사에 동참하게 됐는데, 그 일은 수정 씨가 탈북민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헌신적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동안 헤어졌던, 북한에 남아있던 두 딸은 물론 중국에서 낳은 딸까지 만나게 됐고 모두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인선: 선한 마음으로 봉사를 해서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그런데, 봉사라는 게 탈북민들에게는 굉장히 생소하고 낯설어서 봉사자들을 보고 처음엔 경계를 했다는 분들이 참 많았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봉사의 의미도 알게 되고 봉사자에 대한 고마움이 생기더라고 하는데 수정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네. 수정 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봉사의 의미를 몰라서 선의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봉사의 마음을 받지 못하고 경계심을 갖고 살았다는데요. 조금씩 봉사활동을 하면서 베푸는 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수정 씨입니다. 봉사를 막 시작했을 땐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다 돈을 주던데, 봉사는 보수 없는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대가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봉사자들을 보면서 무슨 재미로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는데요. 어느 순간 그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수정 씨가 봉사해 준 사람들이 자신을 보면 인사하고, 고마워하고, 사랑한다는 말까지 해주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가슴 한 끝이 저려왔고 그때 '이것이 봉사로구나!' 싶었다고 합니다.
수정 씨는 한국에 정착하고 지낸 1년 동안 마음이 허하고 힘들기만 했는데, 지쳤던 마음에 처음으로 활력이 생겼고 아프던 몸도 거짓말처럼 나아버렸다고 했습니다. 우선 우울하기만 했던 성격이 변했습니다. 누가 뭐라고 말해도 걸핏하면 나오던 눈물에 정말 자신을 불쌍한 인간이라고 여겨왔었는데 봉사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스스로가 자랑스러웠고 세상이 따뜻해 보였다고 하더군요. 생각이 달라지니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마음이 열리니 삶에 대한 의욕이 생기면서 봉사의 의미를 다른 탈북민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수정 씨는 같은 지역에 있는 탈북민들과 함께 봉사단체를 만들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인 경제활동도 시작했습니다.
김인선: 특별한 자격 요건이 필요 없는 일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죠. 주로 식당 일이나 청소 등 하루에 몇 시간만 일하는 부업 정도인데요. 수정 씨가 시작한 경제활동은 과연 뭘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