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미화원이 된 군관 사모님(1)

서울-김인선 kimi@rfa.org
2024.04.11
[마순희의 성공시대] 미화원이 된 군관 사모님(1) 노인들이 환경미화 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 안녕하세요.

 

김인선: 2023년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합계 출산율이 0.72명이었는데요. 올해는 0.6명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한국이 압도적인 세계 1위 저출산국이 됐는데요. 북한도 합계 출산율이 1.3명대까지 떨어졌다고 하니 저출산을 고민하기는 한국과 마찬가지 인 것 같아요.

 

마순희: . 제가 북한에 살 때에는 산아제한을 해서 의무적으로 피임을 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살아가기 힘들다 보니 자식을 많이 낳지 않는 것 같네요. 과거에는 자식 여럿 낳아서 배불리 먹이지도 못 하고 고생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한 명이라도 잘 키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는데요. 그 생각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도 7-80년대에 출산억제정책을 썼고 점차 자녀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됐다고 하더라고요. 1990년대 중반 이후로 결혼 연령의 상승, 여성의 경제활동 증가, 자녀 양육 비용의 증가 등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까지 출산율 저하를 초래하는 다양한 이유가 등장했는데요. 북한에서도 그런 변화가 생기는 것 아니겠어요?

 

애들을 키우면서 남들에게 뒤질세라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고 싶은데 경제적으로 어렵다 보니 저출산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북한의 엄마들도 자식들 배불리 먹이고 싶고 사 주고 싶은 것을 다 사 주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북한에서는 해결할 방도가 없으니 몰래 중국으로 가는 엄마들이 많았습니다. 자식들을 더 잘 키우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 사랑하는 자식들과 생이별을 하면서라도 중국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도 마찬가지인데요. 자식을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는 이영란 씨입니다. 영란 씨는 자식을 배불리 먹이기도 쉽지 않고, 또 다른 친구들이 타는 자전거를 부러워하는 아들에게 자전거 한 대 사 주고 싶어서 돈을 벌고자 중국으로 들어갔던 분입니다.

 

김인선: 남이나 북이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싶어하는 건 똑같은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어려서부터 세발 자전거나 네발 자전거를 사주고요. 7살 전후로 두발 자전거로 교체하는 게 일반적인데요. 성장 속도에 따라 자전거 크기를 교체해줘야 하고 가격이 천차만별이라 지출이 만만치 않거든요.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면 부모된 입장에서 사주고 싶거든요. 아마 영란 씨도 그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부족함을 모르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이 갖고 싶어하는 물건을 사줄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그래서 더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영란 씨는 그렇게 힘들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고 할 정도로 어려움 없는 생활을 해 왔던 분이었습니다. 영란 씨 남편이 공군이었다고 해요. 매달 배급은 물론이고 모든 후방 물자가 최고급으로 지원되는 것이 공군이다 보니 생활고를 전혀 모르고 지냈던 거죠. 영란 씨는 남편 덕분에 호사를 누리며 살다가 2002, 남편이 군관 제대로 고향인 함경북도의 산간마을에 배치를 받아서 오게 됐고 그때부터 영란 씨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2002년이면 1990년대의 그 혹심한 식량난도 어느 정도 지나간 시기라 일반 사람들은 그래도 고난의 행군 때 보다는 살만 하다고 느낄 때였는데도 말이죠. 당시 영란 씨 아들은 고등중학교 졸업을 앞둔 때라 잘 나가는 집 애들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그렇게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예전 같으면 금방이라도 사줄 수 있었겠지만 남편이 제대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부터 영란 씨도 남들처럼 겨우 살아가는 정도였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소토지라는 것을 하며 농사도 지어 보았고 굶지 않을 정도로 살아가기도 힘들었던 때에 자전거를 살 만큼 그렇게 큰 돈이 있을 리 없었던 영란 씨는 아들만은 남의 축에 빠지지 않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김인선: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고 혹시라도 기가 죽을까 염려되는 거죠.

 

마순희: . 그래서 영란 씨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당시 중국에 들어가서 몇 달만 고생하면 돈을 벌어서 집 살림도 펴고 자전거 하나쯤은 얼마든지 사 줄 수 있다는 안내자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영란 씨는 그 사람을 따라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안내자를 따라 추운 겨울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너 산속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공안의 눈을 피해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지만 다행히 무사히 들어갔고 영란 씨는 하얼빈 근방의 한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숨어 사는 처지라 주방에서 하는 일만 할 수 있었는데요. 말 한 마디 모르고 해야 하는 일은 고되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생각도 못 하던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영란 씨는 이를 악물고 버텨 나갔고 돈을 벌어서 북한으로 내 보낼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좀 더 풍족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중국에 머문 시간은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는데요. 1년쯤 지났을 때 퇴근길 택시에서 불시 단속을 당하게 되었고 중국말을 모르던 영란 씨는 그 자리에서 잡혀서 북한으로 북송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한국행을 시도하다가 발각돼서 북송되면 처벌이 심하지만 중국에 돈을 벌려고 들어간 경우엔 처벌이 상대적으로 덜하다고 하는 탈북민들도 간혹 계시더라고요. 영란 씨가 북송되던 당시엔 상황이 어땠나요?

 

마순희: 맞습니다. 영란 씨 역시 엄청난 취조를 당했지만 중국에 돈을 벌어보겠다고 들어 간 것이 인정되어 그나마 형량이 경하게 처벌되었다는 것이 1 6개월의 노동단련대 형이었습니다. 경한 처벌이라 하지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고된 노동을 해야 했고 먹는 것은 찬밥 한 덩어리에 된장 물을 풀어 끓인 국 한 사발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없을 때에는 강냉이 겨로 끼니를 대신하기도 했고 여름에는 알감자 몇 알로 끼니를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설사가 빈번했는데 약이 없으니 무슨 나무 잎을 달여서 약이라고 먹게도 했다고 합니다. 또 물 한 바가지를 주는데 먹을 물도 없어서 그 한 바가지는 마시기에도 모자랐고 씻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전 세계가 북한을 비난하는 게 바로 이런 거죠. 수감된 사람도 인권이라는 게 있는데 인간 이하의 삶을 사신 거네요.

 

마순희: . 그런데 더 한 일이 영란 씨에게 생겼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초를 딸도 똑같이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엄마에게 면회 갈 돈을 마련하려던 영란 씨의 딸이 인신매매자들에게 속아서 중국에 들어가게 됐는데, 다시 잡혀 나오면서 영란 씨와 같은 노동단련대에 6개월 형을 받고 들어 온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통보다 딸이 겪는 고통이 영란 씨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영란 씨에게 살아남아야겠다는 힘을 주기도 했다는데요. 영란 씨 모녀는 서로를 의지하며 힘든 생활을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6개월 형을 받았던 딸이 먼저 나가고 영란 씨도 1 6개월의 노동단련대 생활을 마치고 집에 갔는데요. 딸은 북한에서 더는 못 살겠다고 이미 중국에 들어가 버린 뒤였습니다. 영란 씨 역시 믿지 못 할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혀 버린 터라 더는 그곳에서 살아갈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결국 영란 씨도 또다시 두만강을 건넜는데요. 이번엔 25살 다 자란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김인선: 탈북민 누구에게나 한국행은 쉽지 않은 여정이겠지만, 가족이 함께 하고 자녀와 함께 한다면 좀 더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더구나 25, 장성한 아들과 함께 했으니까 서로 의지하면서 고된 탈북여정을 견디지 않았을까요?

 

마순희: . 노동단련대에서는 딸이 있었고 한국행 탈북길은 아들이 영란 씨 곁에 있어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두만강을 건넌 영란 씨 모자는 태국, 라오스를 거쳐서 장장 1년여 만에 2010 5월 드디어 대한민국에 도착했습니다.

 

김인선: 이영란 씨의 한국정착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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