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미화원이 된 군관 사모님(2)

서울-김인선 kimi@rfa.org
2024.04.18
[마순희의 성공시대] 미화원이 된 군관 사모님(2) 구미시 환경관리원 체력검정 [구미시 제공]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 안녕하세요.

 

김인선: .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이영란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영란 씨는 공군이었던 남편 덕분에 고난의 행군 시기도 모르고 살았는데 남편의 제대 후 형편이 나빠지면서 뒤늦게 삶이 달라진 분이셨죠?

 

마순희: . 영란 씨는 2002, 남편이 군관 제대로 고향인 함경북도의 산간마을에 배치를 받아서 오게 되면서부터 난생 처음으로 소토지라는 것을 하며 농사를 지었습니다. 남편이 제대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부터 굶지 않을 정도로만 사는 형편이 됐는데 당시 고등중학교 졸업을 앞둔 영란 씨 아들이, 잘 나가는 집 애들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그렇게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아들만은 남의 축에 빠지지 않게 해 주고 싶었기에 영란 씨는 중국으로 향했고 하얼빈 근방의 한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번 돈을 북한으로 보냈습니다. 1년쯤 지났을 때쯤 영란 씨는 불시 단속으로 북한으로 북송을 당했고 1 6개월의 노동단련대 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된 노동과 함께 힘겨운 수감생활을 한 후 영란 씨는 집으로 돌아갔는데요. 동네에서 믿지 못 할 사람이라고 낙인이 찍혀 버린 터라 지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딸이 먼저 탈북을 한 뒤라 영란 씨도 25살 다 자란 아들과 함께 한국행을 선택했는데요. 1년여 만인 2010 5월에 겨우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영란 씨 모자는 경기도 수원에서 한국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거주지를 배정받은 후로 곧바로 한국생활에 뛰어들었습니다. 브로커 비용을 하루라도 빨리 갚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인선: 많은 탈북민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받은 정착지원금으로 브로커 비용부터 갚더라고요. 영란 씨도 마찬가지였네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영란 씨와 아들, 두 사람의 브로커 비용은 600만원, 44백 달러였는데 처음 받게 된 지원금은 400만원, 2950 달러였습니다. 지원금 모두를 브로커 비용으로 갚아도 15백 달러 정도를 더 갚아야 했기에 영란 씨는 거주지를 배정받은 다음날부터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하루도 쉬지 않으며 부업을 해서 번 돈으로 남은 브로커 비용부터 갚았습니다. 그런 성실한 영란 씨의 모습은 먼저 한국에 정착한 선배 탈북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계시는 탈북민 단체 회장님께서 일자리를 주선해 주셨습니다. 사실 미화원 일이라 영란 씨가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건물이 너무 멋지고 환경도 깨끗해서 영란 씨는 그 자리에서 취직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청소하는 일이라고 우습게 생각했지만 사실 영란 씨가 본 건물은 일반 회사 건물이 아니라 정부기관 중 하나였습니다. 엄청난 기회를 잡은 것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몰랐던 거죠.

 

김인선: 성실하게 본인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일이기에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이 미화원 일을 많이 하시는데요. 한국 정부에서 고령자의 생계유지와 실업대책의 일환으로 환경미화원 채용 시 50세 이상의 준고령자 위주로 선발하도록 지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려면 체력 검증도 받아야 하고 조금 더 절차가 복잡하거든요. 영란 씨는 비교적 쉽게 입사를 한 것 같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무엇보다 공공기관의 채용정보를 알아야 지원이 가능한 일이었는데 탈북 선배님들이 일자리 정보를 영란 씨에게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동네에 탈북민들로 조직된 봉사 모임이 있었는데 특히 봉사 모임 회장님께서는 브로커 비용 때문에 초기정착금을 다 주고 당장 일을 해야 하는 영란 씨의 절박한 사정을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어떤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부업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영란 씨 모습을 보며 어떤 곳에 소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마침 도청 건물 미화원 모집을 하고 있었고 그 정보를 영란 씨에게 알려 주신 것이었습니다. 당시 공공기관에는 탈북민을 일정규모 이상 채용해야 한다는 정책이 적용됐기에 영란 씨가 경기도청 미화원으로 취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입사는 쉬웠지만 말투도 다르고 일도 서툴러서 처음엔 어려움도 있었다는데요. 영란 씨는 성실하게 차근차근 일을 배워 나갔습니다. 나중에는 영란 씨처럼 일 잘 하는 탈북민을 또 받고 싶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정도 받았습니다. 실제로 영란 씨의 성실성 덕분에 다른 탈북민 여성도 취업이 가능했고 함께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도청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미리 건물 내부를 싹 청소해야 하기 때문에 영란 씨는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습니다. 그 대신 오후 3시 반이면 퇴근하고 집에서도 멀지 않은 거리라 출퇴근하기에도 무리가 없어서 영란 씨는 그보다 더 만족할 만한 직장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한 가지 서운한 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맛있는 것도 챙겨주고 원하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아들이 늘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오기에 함께 식사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침은 영란 씨가 새벽같이 일 나가다 보니 아들이 혼자 먹기가 십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영란 씨는 평소 밑반찬 종류를 정성껏 챙겨 놓기도 했고 쉬는 날이면 될수록 아들과 함께 보내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두 모자가 성실하게 살아가는 만큼 경제적인 상황도 빠르게 좋아졌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 맞습니다. 영란 씨 모자가 탈북민 초기 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처음 나왔을 때 한국 정부로부터 한 달에 116만원, 857달러 정도 생계비를 지원받았다고 하는데요. 두 식구의 한 달 생활비로는 넉넉하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하지만 적금부터 들었다는 영란 씨입니다. 주변 선배들이 적금부터 들라고 조언을 해줬는데 영란 씨는 그 말을 받아들였고 적금을 계속 유지하다 보니 4년이 지나니까 1000만원, 7386달러가 되었습니다. 미화원으로 직장에 다니기 시작한 후로 적금 액수를 좀 더 늘려 나갔고 사는 형편은 점점 좋아졌습니다. 그 사이 함께 한국에 온 아드님은 9명의 직원이 있는 탄탄한 중소기업의 사장님이 됐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동안 차곡차곡 저축해 놓은 적금 덕분에 영란 씨는 아들의 결혼식 준비는 물론 새집 장만에도 큰 무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영란 씨 아드님이 사장님이 된 지 금년까지 3년 차가 됐고 영란 씨에게 예쁜 손녀까지 생겼다고 하는데요. 돌이 지난 귀염둥이 손녀가 오는 날은 온 집안에 웃음꽃이 만발한다고 합니다. 영란 씨는 지금까지도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65세가 정년이기에 영란 씨는 앞으로 2-3년 동안은 더 일도 할 수 있는 거죠. 일이 끝나면 영란 씨는 운동을 필수로 하고 있다는데요. 회사에 있는 전용 신체단련장(헬스장)을 이용하기도 하고 공원 산책과 걷기 운동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란 씨가 젊음을 그대로 간직한 활기찬 모습으로 매일매일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인선: 두 분이 한국 정착을 완벽하게 한 것 같아 흐뭇한데요. 듣다 보니 노동단련대를 나와 재탈북했다는 딸은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지네요. 연락은 닿지 않고 있나요?

 

마순희: . 영란 씨도 아들과 행복하게 살다가도 중국에 들어간 후 소식이 끊긴 딸 생각에 아픈 마음을 달래기도 하는데요. 이제는 어디서라도 잘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자전거 하나 사 주고 싶은 마음에 두만강을 건넜던 영란 씨였지만 지금은 아들이 운전하는 멋진 승용차를 타고 휴일이면 가족과 함께 가보고 싶던 곳 어디나 마음껏 여행을 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영란 씨의 삶을 통해 어떤 환경에서도 열심히 정착하고 행복을 이루어 나가는 탈북여성들을 소리 높이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김인선: 군관 사모님에서 14년 차 미화원이 된 이영란 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행복은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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