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학문이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명장이라고 합니다. 과학 기술 분야부터 중식, 일식 등 요식업계, 스포츠계 등 우리 주변엔 다양한 분야의 명장들이 있는데요. 탈북민들 중에도 명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기술이 좋은 분들이 많더라고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중에는 특히 음식 명장들이 많습니다. 북한 식당을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평양 냉면집, 청진 떡집처럼 살던 지역이나 고향 이름을 내세운 식당부터 통일 맛집, 호월일가 등 다양한 북한 음식을 파는 식당들도 있습니다. 된장이나 김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는 분들도 있고, 한국에서 요리대회를 거쳐 북한음식명장으로 선정되신 분들도 여럿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탈북민들 중에 음식 명장만 있는 것 같겠지만, 각 분야마다 명장으로 이름을 알리며 살아가는 탈북민들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리려는 분 역시 한 분야의 명장으로 이름을 알린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4년에 한국에 도착한 임성준 씨인데요. 성준 씨는 손기술이 뛰어나 한때 명장으로 이름을 알렸던 분입니다.
김인선: 기계를 잘 다루거나 기계를 잘 고칠 때도 손기술이 좋다고 하고요. 뭔가를 뚝딱뚝딱 잘 만드는 사람도 손기술이 좋다고 하잖아요. 성준 씨는 어떤 손기술이 좋은 분일지 궁금한데요?
마순희: 네, 임성준 씨는 여러 가지 재료로 창틀(샤시)을 만드는 기술자로 오래 일했는데요. 한국에서는 겨울이 시작될 때면 난방비를 줄이려고 창틀을 교체하는 가구들이 많고, 또 여름이면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범창을 교체하는 가구들이 제법 있어서 창틀을 만드는 기술자를 찾는 사람들이 꾸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명의로 된 집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실내 공간의 변화를 위해 원하는 장소를 다시 만들고 꾸미는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분들도 있기에 수요가 많은 분야인 거죠.
창문마다 크기도 다르고 필요한 창틀의 종류도 각양각색입니다. 강철이나 플라스틱, 알루미늄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지는 창틀을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임성준 씨는 꾸준한 노력으로 그 기술을 연마했습니다. 창틀의 경우 한 번 설치하면 오래 사용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꼼꼼하게 작업을 해야 합니다. 작업 방식이 잘못되거나 건물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 파손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기술은 물론 책임감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준 씨가 그랬습니다. 현장 방문을 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건물 구조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현장 상황에 맞는 작업 방법으로 창틀을 교체하다 보니 점차 전문적인 창틀 교체 기술을 가진 기술자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성준 씨는 꾸준한 자세로 현장 경험을 쌓아갔고 기술과 비법이 다양해지면서 어떤 창틀이든 척척 만들어 내는 명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김인선: 어떤 한 분야에서 명장이라고 불리려면 적어도 10년 정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성준 씨의 경우 그보다는 훨씬 빨리 명장이라는 호칭을 듣게 되셨다니 그만큼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게 아닐까 싶은데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임성준 씨는 타고난 기술자도, 북한에서 기술자로 살아 온 경력자도 아니었기에 노력만이 답이었습니다. 기술은 한국에 와서 처음 익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성준 씨였습니다. 사실 임성준 씨는 장사를 했던 분이었습니다. 처음엔 북한의 대부분 남성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해서 10년 군사복무를 마쳤는데요. 제대되어 돌아온 고향의 현실이 너무도 참혹하게 변해 있었고 직장에 나가도 배급이 전혀 안 되다 보니 먹고 살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성준 씨는 형님과 함께 밀수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송이버섯을 받아서 중국으로 다시 건네다 팔았는데요. 점차 골동품을 사서 몰래 중국으로 다시 넘기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밀수를 통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 수는 있었지만 불법이라 언제든지 보위부에 잡혀서 고초를 겪을 각오를 해야 했었고 수시로 생명을 위협했습니다. 결국 성준 씨는 탈북을 결심했고, 그동안 번 돈을 모두 집에 두고 1997년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김인선: 북한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밀수를 했던 것 같은데, 중국에서도 북송의 위협 속에 불안하게 살기는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어요. 중국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마순희: 네. 성준 씨는 중국에 들어와서 숨어 살면서도 수완이 좋아서 장사를 계속했는데요. 불법체류자 신세로 숨어 살아야 했던 처지였기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성준 씨는 요령 있게 장사 속을 터득해 나갔고 엿 장사, 석탄 장사 등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장사 규모는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수지타산을 따져 보고 성준 씨는 본격적으로 엿 장사를 시작했는데요.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다가 시장에 가져가서 한 근에 0.1달러씩 이윤을 붙여서 넘겨주었습니다. 0.1 달러면 보잘것없는 금액 같지만 워낙 넘기는 양이 많다 보니 꽤 많은 이익이 생겼다는데요. 97년, 98년 그때 당시 중국 내 공무원의 한 달 봉급을 훨씬 넘을 정도의 수익을 남겼다고 하더군요.
김인선: 수익도 많고 규모도 커졌다는 건 그만큼 노출이 많이 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잖아요. 성준 씨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기지 않았을까 염려되는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불법체류자인 성준 씨가 돈을 잘 벌라고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았습니다. 항상 조심하기는 했지만 어느 날 그 누구인가가 성준 씨를 북한 사람이라고 신고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결국 성준 씨는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북송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도 성준 씨는 세상을 새롭게 더 알아가는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한국은 물론 외국에 간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성준 씨는 수용소에서 나오자마자 다시 탈북해서 중국으로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민가를 찾기 어렵고 중국에서부터 이어지는 국경이 수천 km의 긴 거리라 80-90%가 실패한다는 몽골을 통한 여정이었습니다. 목숨을 건 한국행이었지만 30대 중반이었던 성준 씨는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브로커도 없이 떠난 길이었기에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성준 씨는 2004년, 그렇게 어렵다는 몽골을 통한 한국행을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한국에 도착할 때 성준 씨는 30대 중반의 한창 나이였기에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온 후 곧바로 일자리부터 찾았는데요. 시간제 일자리였는데도 북한 사람이라고 잘 써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임성준 씨는 자존심이 강하고 대인관계에서도 선입견이 많았기에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것 같으면 참지 못 하고 툭하면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대인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한국에 온 만큼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성준 씨는 잘 정착하기 위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가장 먼저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준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직업 체험으로 중장비 교육을 받았던 경험이 있기에 중장비 학원에 다녔고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하나원에서 지내는 3개월 동안 중장비 관련한 기초교육을 마쳤기에 성준 씨는 실습과 자격증 시험을 대비하는 학원에 곧바로 등록을 할 수 있었고 금방 자격증까지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격증을 취득한 성준 씨는 금방 회사에 취직까지 됐는데요. 첫 월급을 탄 후 회사를 나왔습니다.
김인선: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서 자격증을 땄던 성준 씨잖아요. 그런데 겨우 한 달 일하고 그만 뒀어요. 과연 그만 둔 이유가 뭘까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볼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