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탈북민에게 자격증이란? (1)
2024.08.29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절기상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에 접어들었지만 뜨거운 바람과 높은 습도로 9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덥습니다. 더운 날이면 커피나 음료를 파는 카페를 이용하는 분들이 부쩍 많아지는데요. 저도 그 중 한 사람이에요. 요즘은 커피에 얼음을 가득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고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탈북민들 중에도 커피를 즐기는 분들 많으시더라고요.
마순희: 네.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탈북민들 중에는 한국에 와서 커피를 처음 접하는 분들이 대부분인데요. 하루를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피문화가 발전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탈북민들도 자연스럽게 커피와 가까워지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00미터, 200미터 간격으로 크고 작은 커피전문점들이 줄지어 있고, 심지어 회사에서도 커피가 거의 필수적으로 구비되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커피를 마시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아무 것도 섞지 않은 커피,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신다고 했는데, 한국에 온 지 20년이 지난 저는 커피와 크림, 설탕이 일정 비율로 섞은 믹스커피를 즐겨 마시고 있어요. 그냥 커피는 쓰지만 믹스커피는 달콤하면서도 커피 향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부담이 없더라고요. 북한에도 이젠 이런 믹스커피가 나왔다고 해서 놀랐는데요. 한국에는 이제 커피의 원료인 원두를 직접 제조해서 판매하는 바리스타로 일하는 탈북민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분들 중의 한 분을 소개하면 좋을 것 같네요. 탈북민 사이에서도 커피전문점 바리스타로 널리 알려진 문가란 씨입니다.
김인선: 다양한 품종의 원두를 향 좋게 볶아 온도와 양 등을 조절해 맛있게 커피 음료로 만드는 사람을 ‘바리스타’라고 하는데요. 다양한 탈북민 지원사업을 하는 정부 산하기관 남북하나재단을 비롯해 여러 기관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바리스타 교육을 진행하면서 커피를 접하는 탈북민들이 많아졌고 바리스타로 일하는 분들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가란 씨도 그 중 한 분인 거네요.
마순희: 네. 지금은 북한에도 부자들 속에서는 커피 문화가 많이 유행이 되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요. 2000년 이전에 북한을 떠났던 많은 탈북민들에게 커피는 영화 속에서, 혹은 외국 소설 속에서 접하기만 할 수 있었던 것이라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커피의 맛과 향이 궁금했는데 한국에 와서 보니 커피는 누구나 마시는 음료 중의 하나였습니다.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수료하고 사회에 나와서 보는 커피 문화는 탈북민들에게 더 새로웠고 선망이 되었습니다. 많은 탈북여성들이 고급스러운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로 일해 보고 싶다는 것이 꿈이라고 유행처럼 말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가란 씨는 그 꿈 속의 바리스타가 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요. 가란 씨 본인은 좋은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바리스타가 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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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선: 기회는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본인이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라는 말이 있어요. 기회가 와도 잡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가란 씨가 겸손하게 말했지만 가란 씨 스스로 본인에게 온 기회를 잡을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마순희: 맞습니다. 가란 씨는 절실함과 성실함으로 한국에서의 정착생활을 했고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2002년 4월에 홀로 한국정착을 시작했던 문가란 씨는 정착 첫 날부터 일을 시작했는데요.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을 하루 빨리 데려오기 위해서 브로커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낮이 따로 없이 열심히 일했던 것입니다. 파라티푸스로 남편이 사망한 후 어린 아들을 친척집에 맡기고 떠난 길이었기에 가란 씨의 마음엔 아들 생각뿐이었습니다. 낮에는 식당에서 일했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양말 뒤집기 등의 부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아들을 데려오기까지 약 2년 남짓한 시간이 걸렸고 최우선 목표였던 아들을 한국으로 무사히 데려왔습니다. 당시 아들은 11살이었는데, 탈북 자녀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대안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다행히 가란 씨의 아들은 처음부터 학교생활에 잘 적응했기에 가란 씨는 자신의 다음 목표를 실천해 나갔습니다.
김인선: 두 번째 목표는 뭘까요?
마순희: 네. 가란 씨의 두 번째 목표는 떳떳하고 멋진 엄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애쓰는 일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는데요. 낮에는 식당에서 일하고 밤이면 직업훈련을 전문으로 하는 폴리텍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교육 훈련비는 전액 나라에서 지원해줬고, 교육을 마치면 취업으로 연계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가란 씨는 외식조리 부문을 지원해서 한식, 중식, 양식 등 다양한 요리를 배웠는데요. 다양한 식재료를 접하는 것부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음식을 만들어 먹을 재료가 없어서 있는 재료로 대충 만들어 끼니를 에우는 것에 불과했지만 한국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양한 식자재를 파는 마트에만 나가 봐도 잘 손질된 식재료가 눈이 모자라게 준비되어 있는데, 그 식재료들이 다 어디에 쓰이는지 알지 못했고, 어떤 맛인지 모르는 것들도 많았던 가란 씨였습니다. 그런데 다양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내야 했으니 가란 씨에게는 모든 게 새롭고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운다는 심정으로 피곤한 줄도 모르고 요리를 배웠고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음식도 정성껏 만들며 다양한 음식 문화를 익혀 나갔습니다.
다양한 조리법을 배우고 직접 실습을 하는 조리사 자격증 취득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한국에서의 정착을 잘 해나가는 아들을 생각하면 힘이 절로 났고 한국의 모든 어머니들처럼 아들의 학교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 했습니다. 가란 씨의 노력을 알아주는 것처럼 아들은 학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표창장도 받아 왔고 학생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엄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가란 씨 역시 열심히 이론과 실습 공부를 하면서 조리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러나 취업으로 연결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조리사의 특성 상 이른 시간에 출근해서 음식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일을 하다 보면 아들의 등교를 돕고 뒷바라지 하는 게 쉽지 않겠다 싶어서 가란 씨 스스로 취업의 기회를 잡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가란 씨는 아들이 등교한 이후에 갈빗집에서 1년 정도 찬모로 일했고, 저녁엔 피부미용학원에서 피부 관리를 배웠습니다. 3개월 과정의 피부 관리사 자격증 과정은 자비가 들어갔지만 가란 씨는 그 돈이 아깝지 않았고 배우는 전 과정이 즐거웠다고 합니다. 자격증 취득 후에는 피부 관리실에서 근무를 하게 됐고 시간 예약제로 운영되는 곳이다 보니 아들을 돌보면서 일하기에도 좋았습니다. 주변에서 같은 탈북민들은 물론이고 한국분들까지도 가란 씨를 칭찬했습니다. 식당 일을 하면서 자신의 전문성을 하나하나 키워 나가는 것도 대단하고 아들도 훌륭히 키우고 있고,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성실한 사람이라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김인선: 조리사 자격증에 피부관리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던 가란 씨였군요. 그렇게 전혀 다른 분야의 일에 도전하던 가란 씨가 또 어떻게 커피 만드는 바리스타가 됐는지 더 궁금해지는데요. 가란 씨의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