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특별하지 않은 삶은 없다(2)
2023.12.28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지난 주, 2023년 성공시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오늘은 매주 성공시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마순희 선생님. 선생님이 살아온 이야기로 2023년을 마무리 하는 건 어떨까요?
마순희: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겨울, 북한의 혹한 속 방공호에서 태어났는데요. 일곱 남매의 여섯 째로 전쟁통에 태어나다 보니 집안의 어르신들이 다 키운 자식들도 죽일지 살릴지 모를 판에 핏덩이 어린 것을 데리고 어떻게 대가정을 돌보며 살겠느냐고 애 없는 집에 줘버리라고 했다더라고요. ‘죽일 때 죽이더라도 내 품에서 내놓지 않겠다’고 난생 처음으로 시부모님 말씀을 거역하시며 저를 고집한 어머님 덕에 남의 집에 보내지는 않았다고 하니 태어날 때부터 고난을 안고 태어난 거죠.
반일 투사였던 할아버지는 친일파로 매도되고 일 밖에 모르시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죄명으로 잡혀 가서 하루 아침에 정치범 가족이 됐습니다. 그래서 항상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요. 어릴 땐 제가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1등만을 해 오며 공부를 열심히 해도 대학 진학은커녕 농업전문학교에 갈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무기력해졌습니다. 북한에서 지낸 48년 인생은 꿈도, 희망도, 웃음도 잃어버린 수난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길녘의 잡초처럼 짓밟히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났고, 세 딸을 나름 잘 키웠고, 대한민국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인생 후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인선: 청년들 못지않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신 분으로 잘 알려져 계신 마순희 선생님, 그런데 마순희 라는 이름 앞에 ‘탈북민들의 국민엄마’라는 수식어는 어떻게 생기게 된 건가요?
마순희: 네. 저는 정말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2003년 53세의 나이로 한국에 입국한 저는 이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걱정했었지만, 그 걱정은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오면서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하나원 수료식 날, 모범적이었던 교육생에게 주는 단 하나의 상이었던 우수상을 숱한 교육생들 중에서 바로 제가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에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상은 내 차지가 안 됐었고, 공은 늘 다른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차별만 경험했던 저였기에 저는 제 이름 석자를 부르는데도 제 귀를 의심했고 무슨 정신에 상을 받으러 나갔었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내가 노력하면 노력하는 것만큼 평가를 받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무한한 선택과 기회의 땅이 바로 이 땅이구나’ 하는 감동을 처음 받아 안은 것입니다. 50이 넘은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하나원을 나와 물류센터에서 시간제 노동, 보험회사의 보험설계사로, 노부부가 사는 집에서 청소와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 입주도우미까지 저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한국의 문화와 생활을 익혀 나갔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배워서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도배 학원, 컴퓨터 학원도 다녔고, 몇 년 후부터는 국립의료원 북한이탈주민 상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탈북민들을 돕는 일을 이때부터 하게 되신 거군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제가 상담사로 일하게 된 국립의료원은 정부 산하의 의료기관으로 탈북민들에게 다양한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병원에 오는 탈북민들은 대한민국에 입국하기까지의 험난한 노정을 거치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서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분들이 의료 혜택도 잘 받고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고 3년 동안 근무했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탈북민들의 경제적 자립과 한국사회 정착을 지원하는 남북하나재단에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기간에 인터넷 상에서 강의를 듣고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사이버대학에 입학하여 한국의 사회복지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사회복지사 자격증과 심리상담사, 인성지도사, 노인 케어상담사 등 여러 가지 자격증들도 취득했습니다. 60이 넘어 시작한 대학 공부가 쉽지는 않았지만 강의 내용을 녹음해서 출퇴근시간에도 계속 반복하여 들으면서 공부에 열중했는데요. 그렇게 4년간의 대학공부를 마치고 사회복지사 학사를 받던 날 저는 북녘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도 대학을 졸업했노라고 마음껏 소리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김인선: 남북하나재단에서도 전문적으로 탈북민 상담을 이어가면서 ‘탈북민들의 국민엄마’라는 별명이 생기게 된 거 아닌가요?
마순희: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2011년 61세 되던 해 하나재단에 공채로 입사하여 종합상담센터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요. 많은 탈북민 분들이 저를 찾아주셨습니다. 국립의료원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어르신들이 하나재단 교육프로그램에 참석하러 왔다가 우리 팀장님이 근무하시는 곳이라며 부러 찾아와서 만나고 가셨는데요. ‘우리 팀장님, 우리 상담사 선생님’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그 분들의 기대와 바람대로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냥 열심히 근무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참여했는데요. 덕분에 받아 안은 영광도 많았습니다. 서울 남부법원의 시민사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명 인사들이 하는 야구 시구를 하는 영광도 지녀보았고 통일부장관상과 사회봉사대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들도 받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의 성실한 노력을 방증해 주는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하지만 더 열심히 살라는 격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재단에서 퇴직한 후에는 우리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사례들을 만나러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다녔습니다. 또 북한에 있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수많은 나라들도 다녀왔는데요. 미국, 중국, 마카오, 태국, 그리고 터키,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베니스 등 딸네 가족과 함께 여행하면서 즐길 줄 아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2013년부터 ‘찾아가는 종합상담소’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지금은 ‘마순희의 성공시대’라는 이름으로 지금 듣고 계시는 자유아시아방송에서 라디오 방송도 하고 있는데요. 우리 탈북민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희로애락을 애정을 가지고 진실하게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영광스럽습니다. 함께 한국에 온 세 딸들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인정받으며 잘 살고 있고, 손자, 손녀들 역시 잘 자라주었으니 이만하면 저도 나름 잘 정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직도 정착은 현재 진행형이기에 소중한 지금의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금년 한 해는 남북하나재단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지역공동체 지원사업 ‘학마을 자조모임’을 운영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인선: 은퇴 후에도 여전히 바쁘시고, 여전히 탈북민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네요. 올해로 한국 정착 20년이 되셨더라고요. 한국살이 20년, 어떠셨나요?
마순희: 뒤돌아 보니 순간인 듯 합니다. 하루하루 그 순간, 순간들이 모여서 인생이 되듯이 상담사로 첫 근무를 시작하던 그 시절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공시대를 하면서 ‘국민엄마’라는 수식어가 제 이름 앞에 붙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 수식어에 부합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오늘도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모두들 금년 한 해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새해에도 성공시대 주인공분들의 이야기 기대해 주세요.
김인선: 네. 2023년 며칠 남지 않았는데요. 건강하게 마무리 잘 하시고요. 내년에 더 활기찬 모습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