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투자는 기술에! 용접기술자 김영일 씨(1)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19.09.05
welder_defector1_b 인천시 부평구 한국산업인력공단 글로벌숙련기술진흥원에서 한 용접 기술을 연마하는 모습.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네. 장마도 지났고 더위도 한풀 꺾이니까 한결 지내기가 좋아진 것 같아요. 바람도 선선하고요. 그래서 저는 이맘때가, 가을이 가장 좋더라고요.

마순희: 네. 저도 가을을 좋아합니다. 만물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사실 너무 춥거나 너무 무더운 여름보다는 아무래도 꽃 피는 봄이나 풍성한 가을이 더 좋은 것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지난여름, 남한의 무더위가 장난 아니었지만 북한의 무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해요.

김인선: 아니 원래 북쪽으로 갈수록 기온이 좀 더 낮지 않나요?

마순희: 온도 차이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한에선 아무리 더워도 실내에서 에어컨을 켜 놓거나 선풍기를 돌리니까 더위를 느낄 수 없고 또 제일 무더운 여름철에는 피서지로 휴가를 가서 바다에서, 계곡에서 산장에서 더위를 피해서 쉴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이지만 북한에선 그렇지 못하답니다. 물론 오래전 일이기는 합니다만 제가 북한에 있을 때에는 회사생활을 하더라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여건들이 안 된 곳이 더 많았고 더욱이 농촌에서는 무더위에도 계속 일해야 했으니 키 넘어가는 옥수수 밭에서 숨이 컥컥 막혀도 세 벌 김, 네 벌 김을 매야 했었으니까요. 오늘 소개해 드릴 사례의 주인공에게도 여름철,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도시에서 회사에 다니는 50대 후반의 김영일 씨인데요. 북한을 탈출하여 두만강을 건널 때가 한창 장마철인 8월의 어느 날이었으니까요.

김인선: 저는 고난의 행군 때나 두만강이 어는 추운 겨울에 탈북했다는 분들 얘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거든요. 탈북시기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겠지만 김영일 씨가 장마철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을 건넌 사연은 뭘까요?

마순희: 김영일 씨의 고향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었다고 합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모두 어려움을 겪는 때인 90년대에도 영일 씨 가족은 중국에 있는 친척들 덕분에 그나마 생계를 이어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합니다. 영일 씨는 북한 함경남도의 한 기업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했었는데 고급기능공이라 기술도 남들보다 뛰어났고 워낙 성실한 성품이었기에 말 그대로 ‘충성’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모범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더는 그 나라에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답니다. 2006년 모범 노동자인 그를 조직에서는 국기훈장 제2급 내신을 하였었는데 그것이 출신성분을 고려해서 상급기관 심사에서 부결되었던 것입니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어머니와 형제들이 차례차례 중국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아니고 형제들이 먹고 살려고 중국에 다녀 온 것이 무슨 큰 잘못이라고 훈장 내신도 거부하는가 하며 반발심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을 잘해도 자신의 앞길은 그것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자 큰 정신적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영일 씨의 아내가 배낭장사를 떠났다가 한주일 정도 걸려서 돌아와 보니 온 몸을 운신도 못 할 정도로 쓰러져 있었답니다. 아무리 성심성의로 간호해도 좀처럼 병은 차도가 없고 게다가 시댁 식구들이 중국에 갔다고 집에는 감시까지 붙어 있었다고 하니 온 가족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다행히 남편의 쓰러진 모습을 확인하고는 보위부의 감시가 허술해졌고 김영일 씨와 아내는 가다가 죽더라도 병 고치러 중국에 가야겠다고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17살이었던 아들과 함께 2006년 8월에 고향인 함경남도에서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곳까지 국경 연선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두만강 옆에까지 겨우 왔는데, 장마철이라 두만강이 무섭게 불어나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미 감시를 따돌리고 떠난 길을 두만강가에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불어난 두만강을 건넌 겁니다. 아들과 부인까지 모두 어른이기는 했지만 보통 때면 30분이면 가 닿을 곳을 저녁 8시에 시도한 길이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겨우 중국 친척집에 들어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영일 씨의 경우 아픈 몸으로 두만강을 건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을까요? 그나마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 천행이라고 하더라고요.

김인선: 영일 씨의 말처럼 천운이 따라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서 나왔던 얘기 중에 국기 훈장 2급이라는 게 있었잖아요. 일종의 공로상에 해당되는 것 같은데요. 수상 여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기여도보다 출신성분이 더 중요한가요?

마순희: 네, 맞는 말씀입니다. 본인의 실력이나 기여도에 따라서 수상여부를 거론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하부조직에서 수훈을 신청하더라도 상부에서 심사를 할 때에는 본인의 실력이나 기여도보다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평가를 더 많이 하거든요. 출신성분이 나쁘면 입당도, 수훈도, 출세길도 다 막히는 겁니다. 사실 국기훈장 제 2급이라고 하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제일 높은 훈장이죠.

김인선: 제일 큰 상인가요?

마순희: 네. 1급은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그러니까 사망할 정도의 사람들이 받는 거니까요. 2급 역시 정도의 기여도를 보였을 때 주는 거라고 합니다. 국기훈장 제 2급을 받을 정도면 거의 영웅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죠. 그런 영예스러운 수상을 출신성분 때문에 못하게 됐으니 미련 없이 고향을 떠나게 됐고 중국으로 간 겁니다.

김인선: 그래도 부모님의 고향이 중국이라고 했으니까 중국에서 지내기엔 한결 수월했겠어요?

마순희: 맞습니다. 김영일 씨의 경우에는 중국말도 약간은 알 수 있었으니까 위험은 한결 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운신을 못 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던 영일 씨에게는 치료가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래도 북한보다는 의료 기술이나 의약품이 좋아서 1년 정도 치료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몸이 조금 추서자(회복되자) 불법 체류자로 친척집에 얹혀 지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눈치가 안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불법 체류자인 것이 알려지면 손 쓸 새도 없이 북한으로 도로 잡혀 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의 친척들까지 불이익을 당할 형편이라 하루하루가 불안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김영일 씨는 중국에서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살 바에는 차라리 대한민국으로 가서 떳떳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브로커를 수소문하여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2008년 3월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김인선: 김영일 씨는 북한에서 용접일을 하면서 노력혁신자로 국기훈장에 이름이 거론됐을 정도였으니까 기술적인 부분에서 꽤 능력이 뛰어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한 정착과정에서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 같은데요?

마순희: 아니요. 한국에서 영일 씨의 뛰어난 기술을 선보이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영일 씨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부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건강이 아직 회복되지 못했던 영일 씨였기에 힘든 작업은 무리이기도 했습니다. 영일 씨는 자신이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안 좋았다고 해요. 그런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 어느 날 아내는 회사 근처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가져다 주었는데 그것은 기술전문학원에서 수강자를 모집하는 광고지였습니다. 영일 씨는 그 학원에 입학했고 북한에서 용접을 한 경험을 살려 용접기술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용어가 다르고 기술 방법이 달라서 힘들어도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우고 익혀 나갔다는 김영일 씨입니다. 두 달 간의 기술전문학원 과정을 수료하고 그 어렵다는 용접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용접산업기사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용접을 하고 하나의 제품을 완성하는 작업을 모두 수행할 수 있다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말합니다.

김인선: 성공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기초부터 그냥 열심히 한 것뿐이라고 하더라고요. ‘하나하나 기술을 익혔다’라는 김영일 씨의 대답도 사실 너무 뻔한 것 같은데요. 그 뻔한 방법을 실천한다는 게 쉽지 않죠. 기본부터 하나하나 열심히 익히며 일해 온 김영일 씨, 남한생활에 익숙해지는 데는 또 어떤 비법이 있었는지 다음 시간에 들어보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고맙습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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