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보다 최선을, 김영희 씨(1)

서울-김인선 xallsl@rfa.org
2019-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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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 주방에서 할머니들이 칼국수와 만두를 만들고 있다.
음식점 주방에서 할머니들이 칼국수와 만두를 만들고 있다.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이젠 슬슬 불안한 마음까지 들어요. 뭔가를 참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성과가 없거든요. 달력도 한 장밖에 없는데.. 그동안 저는 뭐 하면서 살았을까요?

마순희: 거의 모두가 같은 심정 아닐까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뚜렷하게 이거다 하고 내 놓을 건 없어 보여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 하면서 열심히 살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거면 충분하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요. 오늘 소개할 주인공의 이야기를 들으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걸 잘 알게 될 것 같은데요. 올해 60세 나이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김영희 씨입니다. 그냥 식당에서 일하는 평범한 종업원이지만 성공시대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인데요. 영희 씨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던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답니다.

김인선: 맞아요. 고개를 자꾸 끄덕이게 되는데요. 저의 이런 반응은 보통 마무리 인사할 때 나왔거든요. 김영희 씨 사례, 벌써 마무리 지어야 하나요?

마순희: 무슨 말씀! 이제 시작인 걸요. 오늘의 주인공 김영희 씨는 저보다도 3년 먼저 한국에 정착한, 저에게는 한국 정착의 선배인데요. 영희 씨를 대표하는 단어를 꼽으라면 ‘성실’과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영희 씨는 생활고를 피해서 8살, 10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1998년에 남편과 함께 무작정 중국으로 갔다가 2000년 3월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당시엔 탈북민도 얼마 없었고 지금처럼 정착지원제도가 잘 수립되어 있을 때도 아니라서 모든 정보를 스스로 찾아서 배우기도 하고 직업도 찾아야 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하늘처럼 믿던 남편이 한국에 온지 6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영희 씨 혼자 두 아들을 데리고 가장으로 살아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도 영희 씨는 두 아들을 위해서 주저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컴퓨터 학원,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전문지식을 익혔습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김밥집을 비롯해서 시간제 부업을 해 가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직업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아서 직업소개소에 소개비를 내면서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하다가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손칼국수집에 취직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12년간 일했습니다.

김인선: 자기 가게 내고 싶은 욕심도 생길 거 같은데 혹시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으신가요?

마순희: 그렇죠.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두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5학년이었다고 하니 두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두 아들을 돌보면서 일해야 하는 영희 씨였기에 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칼국수집이 출, 퇴근하기에도 좋고 일도 너무 힘들지 않은 식당이라 일하게 된 것입니다. 영희 씨는 두 아들을 돌보면서 식당에서도 일하고 가까운 상가에서 건물관리를 하는 일까지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들들이 중학생이 됐을 때에도 식당 창업을 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두 아들을 키우는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을 안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김인선: 초등학생이었다던 두 아이들이 이젠 청년이 됐겠어요.

마순희: 네. 초등학생으로 한국정착을 시작한 영희 씨의 두 아들 모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서 탈북민 특별전형으로 서강대 경영학과에 입학하고 졸업까지 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 자라온 두 아들은 크게 별 탈 없이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각자 본인이 희망하던 대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답니다.

김인선: 이제는 자신의 일을 할 정도로 장성했다지만 두 아들이 대학을 다닐 때는 어떠셨을까요? 두 명의 대학등록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말이죠.

마순희: 한 명을 공부시키는 것도 만만치 않는데 두 아들을 함께 공부시켰으니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대학 등록금이라는 게 만만치 않아도 우리 탈북민에게는 등록금 전액 지원이 가능하고요. 게다가 공부를 잘하면 장학금도 나옵니다. 물론 대학에 다니는 것이 등록금만 내면 되는 것이 아니고 교재비나 각종 회비 등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지만 일반 학생들에 비해 지원이 많은 편이랍니다. 거기에 영희 씨가 열심히 돈을 벌어서 두 아들이 대학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생 중에는 등록금을 내기 위해 은행에서 학자금 대출을 받는 사람도 많은데요. 영희 씨의 두 아들들은 그런 걸 모르고 무난히 4년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영희 씨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돈을 마련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요. 그래도 영희 씨는 아들들이 공부하면서도 부업을 해 자신의 생활비를 보탰다면서 기특한 아들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김인선: 두 아들이 장성하기 까지 남편이 함께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살면서 힘들 때마다 남편 생각이 참 많이 났겠어요.

마순희: 네, 워낙 슬픈 이야기라 제가 잠시 미루었는데요. 영희 씨의 남편은 북한에서 해군 군관으로 복무했던 군관 제대군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와서 군부대 안보 강의에 많이 초대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 온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신 거죠. 하늘같이 믿던 남편을 잃은 영희 씨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어요?

 

다만, 영희 씨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강인함으로 대신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멋지게 성장한 두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 아들을 잘 키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지금 영희 씨의 큰 아들은 컴퓨터 관련 전문가로 일하고요. 작은 아들은 중견 기업에 입사해서 근무 중입니다. 안정된 직장을 얻은 작은아들이 영희 씨에게 이제 그만 일하고 쉬시라고 권한다는데요. 영희 씨는 지금도 식당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답니다.

김인선: 한국에 와서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으시네요.

마순희: 뜻하지 않게 잠시 쉬어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일하던 손칼국수집 사장이 병으로 식당을 그만둬서 영희 씨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쉬게 되었던 것인데요. 아들들은 잘됐다고 좋아했지만 영희 씨는 그게 더 못 할 일이었다고 합니다. 며칠은 편하고 좋은 것 같았는데 집에만 있으니 사람이 바보가 된 것 같더라고 표현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영희 씨는 다시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두 아들이 아무리 말려도 집에 있으면 없던 병이 생길 것 같았으니까요. 결국 영희 씨는 여의도에 있는 식당, 돈까스집에 취직을 했는데 오전 10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는 퇴근하기 때문에 영희 씨는 적당한 일자리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일한 지도 벌써 3년차가 됐다고 합니다. 젊은 회사원들이 즐겨 찾는 맛집이라고 하던데 저도 언제 시간을 내서 한 번 가보려고 생각합니다.

김인선: 맛집으로 소문난 곳이면 손님이 많을 테고, 손님이 많으면 김영희 씨가 힘들지 않을까 괜스레 염려가 되는데요. 그런 말도 있더라고요. 나이 들수록 몸을 더 많이 움직여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이요. 그래서 영희 씨가 열심히 일을 하는 걸까요? 여전히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은 김영희 씨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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