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5주년, 김일성의 날조된 항일투쟁사 정리해야

강인덕· 전 통일부장관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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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인 지난 15일 북한 근로자, 학생, 인민군 장병들이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헌화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6일 보도했다.
광복절인 지난 15일 북한 근로자, 학생, 인민군 장병들이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김정일 동상에 헌화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6일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당 간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75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13세였던 본 방송자는 제각기 급조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평양시민들이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그 기쁨에 휩싸여 조선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 감격의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해방된 8월 15일 그날 밤, 우리 민족의 증오의 대상이었고 일제 식민지 상징이던 평양신사, 을밀대 바로 밑 아름다운 모란봉 산 중턱에 세웠던 평양신사를 어느 누가 불 질렀는지 활활 타오르던 그 불길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해방의 감동과 환호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삼천리금수강산 우리 영토가 38도선을 중심으로 미·소양군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분명히 말해 수만의 우리민족은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초개와 같이 생명을 바쳐 싸웠습니다. 그 대표적인 항일투쟁이 1919년 3·1운동이었고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총독에 대한 수류탄 투척,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천황 생일을 경축하는 중국 대륙 침략군 지휘관에 대한 수류탄 투척사건이었습니다. 이승만, 안창호, 김구 등 민족세력 독립운동가들은 중국대륙과 시베리아 벌판 그리고 미주 대륙에서 외교와 무장투쟁을 병행하며 해방되던 그날까지 상해임시정부의 독립기구를 사수했습니다. 한편 좌익독립운동 세력은 소련 령 시베리아와 중국대륙에서 소련공산당 당원으로 또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사가 연해주에서 활동하신 이동휘 선생이고 중국공산당 본거지 연안에서 조선독립동맹을 창설한 김두봉, 최창익 등이었고 특히 돋보인 사람은 중공군 산하 팔로군의 포병사령이었던 무정이었습니다.

이처럼 해방되던 그날 1945년 8월 15일까지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은 간단없이 계속되었지만 끝내 항일 참전국의 일원이라는 국제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일제가 패망하던 당시, 아니 1930년대 후반부터 이미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군의 소탕작전에 의해 거의 와해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의 민족주의 독립 세력은 수백 명의 광복군을 보유하며 장개석 국민당정부의 비호 하에 중국대륙을 전전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했지만 본격적인 전투작전을 전개하지 못했고, 만주에서 활동하던 좌익독립운동세력은 만주주둔 일본군인 관동군의 소탕작전으로 완전 와해되어 흑룡강을 넘어 소련 령 연해주로 도주했습니다. 여러분 당이 빛나는 항일 무장투쟁의 전통이라 주장하는 항일 빨치산 세력은 1940년 이후에는 만주에서는 이미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고 연해주 하바롭스크에서 소련 극동군사령부 산하의 작은 첩보활동 집단, 중국공산당 항일연군의 지휘자의 한사람이던 주보중을 사령관으로 하는 88특수여단에 기식하고 있었습니다. 소련군 기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이 88특수여단의 병력은 중국인, 조선인, 몽고인, 소련거주 조선인 등 총 200여 명이었고 이중 조선인은 남녀가족포함 60여 명에 불과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들 중에 여러분 당이 자랑하는 김성주 즉 김일성, 최용건, 최현, 김책, 김일 등이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과 체결했던 중립조약을 깨고 대일전쟁을 선포하던 그때는 극동군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하바롭스크 근교 주둔지에서 대기하는 처지였습니다. 소련군이 함경북도의 북단 응기와 청진에 대한 상륙작전을 전개할 때 조선인으로써 이 작전에 참가한 사람은 오직 한 명 정률, 소련군 병사뿐이었습니다. 이미 이때는 일본 본토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2발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미, 영, 소 등 연합군의 항복조건을 일본 천황이 수락하기로 결정했던 때이고 결국 소련군 참전 6일 만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으니 하바롭스크 근교에서 출동명령을 기다리던 88 특수여단의 빨치산 출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 한방 쏘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백두혈통 운운하는 여러분 당의 수령 김일성 집단의 항일 빨치산 투쟁의 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8·15해방이 되던 그날까지 이들은 국내로 들어올 수 없었고 겨우 1945년 9월 19일 추석 전날 소련군 극동사령부가 준비한 선박으로 원산으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인솔지휘관은 소련군 2세인 이동화 소좌였습니다. 이처럼 실제 대일전투에는 이들 빨치산 출신들 중 단 한명도 참전한 일이 없었고 총 한방 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당이 출간한 ‘조선로동당사’는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에게 조국진격의 최종명령을 하달하여 우리 민족을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시켰다고 거짓, 날조된 기술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지적할까요? 조선로동당사 제2장 ‘항일무장투쟁을 중심으로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의 발전, 공산주의 대렬의 조직·사상적 통일을 위한 투쟁, 1931년 12월에서 1936년 2월’로부터 시작해서 제 4장 조국광복의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한 투쟁, 항일무장투쟁의 위대한 승리, 1940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즉 2장에서 4장에 이르는 130쪽의 분량을 새빨간 거짓말로 점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1945년 8월 9일 조선인민혁명군에게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 공격작전명령을 내렸다“고 허무맹랑한 거짓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 간부 여러분! 이런 거짓 역사기술을 여러분 당의 양식으로 바로잡아야 하지 않습니까? 소련공산당은 스탈린에 대한 숭배를 1956년 2월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수정했고 중국공산당은 1980년대에 들어서자 모택동에 대한 과장된 기술을 수정하고 그 대신 그의 과오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줄 압니다만 김정일이 백두산 귀틀집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그 근방 봉우리를 김정일봉으로 명명한 것도 새빨간 거짓입니다. 김정일은 김일성·김정숙이 88특수여단에 기식하던 하바롭스크에서 출생했습니다. 8·15해방 75주년을 맞이한 지금이야 말로 더 이상 날조된 거짓 항일투쟁사를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아무리 거짓으로 역사를 날조해도 반드시 진실이 드러난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길 때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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