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입니다. 이 시간 진행을 맡은 미국 워싱턴의 홍알벗입니다.
며칠 후면 6.25 한국전쟁 발발 73주년입니다. 남한은 북한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그리고 북한은 남한이 먼저 일으켰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전쟁 자체는 물론 그 책임의 논쟁까지도 휴전 또는 정전이라는 이름 아래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6.25한국국전쟁 발발 73주년, 전쟁도발의 진실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갖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한국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인 한국 서울의 안찬일 박사께서 자리 함께 해 주셨습니다. 안찬일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MC: 이미 언급했습니다만, 6월이 오면 6.25 한국전쟁이 가장 먼저 떠 오르죠. 먼저 이 전쟁을 대하는 북한의 입장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어떻습니까?
안찬일: 네, 북한 당국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무고한 군인들과 주민들이 죽어 갔지만 그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커녕 그 책임을 한국으로 돌리며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도발로 여전히 멈춰진 전쟁을 재도발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전쟁 당시 세대가 권력을 물려준 지 오래지만 아직 평양에는 6.25남침 전쟁의 그 피줄, 김씨 정권이 3대 세습, 4대 세습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야말로 전쟁까지 세습으로 이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반도에서 진정한 평화는 6.25남침 전쟁도발에 대해 김정은 정권이 사과하고 대량살상무기 핵무기 개발 등을 포기할 때 찾아온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MC : 결국 북한은 6.25 한국전쟁의 발발 책임을 남한에 떠넘기고 있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안찬일: 북한의 아닌보살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즉, 전쟁도발의 책임을 한국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역시 북한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지금껏 각광 받지 않은 6.25전쟁의 도발 초기 상황을 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즉 북한의 초기 전쟁 씨나리오는 서울만 점령하고 통일을 선언하는 형식이었습니다. 남침전쟁 도발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겨우 38살이었습니다. 군 경력은 소련군 대위 대대장이 전부입니다. 그가 이미 자유민주주의 기지로 변해가는 대한민국을 점령한다는 것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김일성은 1946년 월북한 남로당 총수 박헌영의 말을 곧이 듣고 일단 서울을 점령한 뒤 한국의 국회의원들을 긁어 모아 통일을 선언하면 남한 각 지역에서 20만 명 이상의 남로당원들이 들고 일어나 한반도가 통일된다고 착각하고 애초에 북한군의 남침 작전계획을 서울 점령까지로 세웠습니다. 이 아마추어들은 한반도 공산화가 뭐 소련군이 1945년 8월 만주와 북한 지역을 먹는 정도로 착각한 것입니다.
MC : 그런데 그동안 이런 상황은 그렇게 많이 강조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알려지게 된 것인지요?
안찬일: 네, 널리 알려진대로 1991년 8월 24일 고르바쵸프에 의해 소련공산당 해체가 있었지요. 사실상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는 순간입니다. 이때를 전후해 소련의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던 유성철 전 북한군 총참모부 작전국장이 한국을 몇 차례 방문해 김일성의 남침전쟁에 대한 중요 증언을 하였습니다. 1948년 2월 8일 창건된 북한군의 초대 작전국장은 빨치산 출신 김광협이었는데 북한은 남침전쟁을 앞두고 소련 군 고문관들의 지도하에 남침작전계획을 수립하면서 김광협을 전선의 2군단장으로 내보내고 그 자리에 러시아어를 잘하는 유성철을 임명했습니다. 바로 이 유성철이란 사람이 자신이 직접 짠 작전계획에 북한군이 서울만 점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일성 등 북한의 지도부는 한반도 공화산화 꿈만 꿨지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전쟁의 불을 지른 것입니다.
MC : 이와 같은 사실이 왜 그동안 조명을 받지 못했을까요? 북한 주민들이 듣고 나서 수긍할만한 또 다른 증언은 없나요?
안찬일: 네 또 있습니다. 6.25 남침전쟁 당시 북한군 간부들의 증언이 그것으로 이상조 북한군 부총참모장도 그런 증언을 했고, 특히 개성으로 남침을 시작한 북한 군 6사단 정치보위부장 최태환 중좌의 증언이 가장 확실한 증언으로 남아 있습니다. 최태환 씨는 1989년 서울에서 <젊은 혁명가의 초상>이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 남침 초기 서울만 점령한다는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남침전쟁 도발 2일 전인 1950년 6월 23일, 개성으로 당시 북한 권력의 2인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두봉이 직접 내려왔는데, 그는 김두봉이 6사단 간부들을 전부 모아놓고 이렇게 연설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곧 조국통일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1주일 동안만 서울을 점령할 것이다. 서울은 남조선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심장을 장악하게 되면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어느 외국도 우리를 간섭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 군관 동무들은 해방전쟁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고 임무에 충실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증언을 저는 책에서도 읽었지만 그 분이 저의 집에 자주 놀러와 직접 그 분의 입을 통해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MC : 그렇군요. 그런데 김일성의 남침전쟁 계획은 북한 권력층 내부에서도 상당한 반대에 부딪쳤다고 하는데 그건 또 어떤 내용인지요?
안찬일: 네, 명백한 사실입니다. 당시 북한군의 총사령관은 항일빨치산의 노장 최용건이었고 그는 북한 정권의 민족보위상으로 인민군의 군령권과 군정권 모두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침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로 달려가 스탈린을 만나 호돌갑을 떨며 촉진되었습니다. 최용건과 박일우 등은 남조선을 공격하면 분명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며 좀 더 때를 기다리자고 말렸습니다. 당시 애치슨 라인으로 미국은 한국을 자신들의 방어선 밖으로 밀어냈지만 노련한 군인 최용건 등은 현실을 바로 본 것입니다. 최용건은 1970년대 초반 김정일로의 권력세습도 반대한 사람이니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좀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때 김일성과 박헌영이 최용건의 말을 듣고 심사숙고했다면 3년간의 처절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MC : 현재 한반도의 상황은 지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조인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지만 그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텐데요. 혹시 북한 지도층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안찬일: 오늘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에서 세계 7위, 군사력에서 6위의 강성국가입니다. 반면 북한은 경제발전은 순위에도 못 들어가고, 군사력은 16위 밖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북한이 전쟁을 도발한다면 3일도 안 돼 평양정권은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소련은 5,000개 이상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김정은 정권은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MC : 네,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순서,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안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안찬일: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MC: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