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9.28 서울수복 72주년의 의미

워싱턴-홍알벗 honga@rfa.org
2022.09.29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9.28 서울수복 72주년의 의미 지난 24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72주년 서울수복 기념행사에서 해병대의장대가 태극기 게양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홍알벗입니다.

 

지난 928일은 한국전쟁 발발 후 3일만에 북한군에게 서울을 빼앗겼지만, 915일에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과 국군이 다시 서울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9.28 서울수복 72주년의 의미란 주제로, 한국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인  안찬일 박사와 이야기 나눕니다. 안찬일 박사와 이야기 나눕니다.

 

MC : 안찬일 박사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잘 지냈습니다.

 

MC : 안찬일 박사님,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상황을 좀 설명해 주시죠.

 

안찬일: 사실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 출신으로 큰 전쟁을 지휘해본 경험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휘하 북한군이 3일 만에 한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다시 한강을 건너 남진을 개시하였을 때만 해도 북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UN군이 한국전에 투입되고 미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북한군은 퇴로를 차단당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노련한 전쟁경험자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전선의 종심이 너무 깊어지니 후방을 잘 관리하며 남진하라”고 충고했지만 이성을 잃은 김일성에게 그 말이 들릴 리 만무했습니다.

 

바로 이 무렵, 2차 대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에 의해 북한군의 퇴로를 자르는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되게 됩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유엔군과 국군이 10 1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는 일은 거의 계획되지 않았습니다.

 

MC : 그렇군요. 전쟁 발발 초기 남측은 대비가 안 됐던 상황이라 부산까지 속절없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안찬일: 그렇습니다. 6.25 전쟁이 개전된 이래 북한군은 대한민국 국군을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하나, 이곳에서 전선이 고착되게 됩니다.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계속 승리하며 겉보기에는 유리한 상황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길어진 보급로와 계속되는 전투, 그리고 연합군이 미친듯이 쏟아부은 폭격으로 인해 정예부대의 전투력이 크게 고갈된 상태였습니다. 특히 북한이 소련에게 공여받은 250여대의 T-34전차의 경우, 서울에서 탱크 쇼크에 맛을 들인 북한군 수뇌부에 의해 제대로 된 제병 합동 전술을 만들지 않고 무의미하게 기갑전력을 소모시켰고, 결국 낙동강 전선에서 별다른 전술 없이 대부분의 기갑전력을 일회용으로 소모해버리게 됩니다. 당장 1950 9월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한 병력은 점령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강제 징집한 자칭 의용군 5만여 명을 포함해서도 10만 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은 UN군의 참전 덕분에 동수 이상의 병력을 확보하고 워커 중장의 우주방어로 간신히 낙동강 전선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MC : 그렇군요. 그런데,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할 때 이야기 좀 해주시죠.

 

안찬일: 인천상륙작전은 1950 9 15,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작전으로. 2차 세계 대전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미드웨이 해전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초기에 북한군에게 연패하며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잘 언급되지 않으며, 상륙작전으로 일어난 전투의 일부인 "월미도 방어전투"라는 표현만 자주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코드네임 즉, 암호는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보안 유지에 특히 신경쓰고자 작전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어들 중 크롬 광석에서 따와 지었습니다.

 

MC :  그런데, 궁금한건, 과연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어떻게 그 많은 병력을 인천 앞바다에 집결시켰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안찬일: 처음 유엔군과 한국군은 군산을 상륙지로 선택하였다고 합니다. 인천에 상륙하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5000분의 1이라고 미국 작전가들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륙지로 결정된 것은 일단 인천 이외에 맥아더 장군이 원하는 적 후방의 완전 단절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장소가 달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군산시의 경우 상륙하기는 양호하나 앞서 언급했듯이 상륙해도 북한군의 보급선을 절단하지도, 적 병력을 포위하지도 못하는 허점이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상륙하느니 해당 병력을 부산으로 증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이 난 지 오래였습니다.

 

평양 이남의 남포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이 지역은 적의 수도 턱밑이므로 방어가 튼튼한데다가 가장 중요한 원산-서울-낙동강 보급선을 막지 못하는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당시 인천에는 대략 1,000명 이내의 북한군만이 인천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이건 적중했습니다. 또한, 김포 등 내륙으로 진입하기에 상대적으로 거리가 짧아 서울 자체를 점령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철로와 도로를 끊어 북한군의 병참로를 차단할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맥아더는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했고 결국 1950 8 28,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은 최종 승인을 받게 됩니다. 즉시 일본 등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 상륙정과 함선들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하게 됩니다.

 

MC : , 너무 인천상륙작전 이야기가 길어진 것같습니다만, 사실 그 성공 덕분에  유엔군과 국군은 바로 서울을 되찾게 되는 것이죠?

  

안찬일: 그렇습니다. 1950 9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그동안 열세에 있던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고, 이로써 서울탈환의 교두보가 확보되었습니다. 상륙작전의 선봉에 선 미국 해병 제1사단과 한국군해병대는 18일 김포비행장을 탈환한 다음, 행주나루터의 맞은편에서 한강을 건너 그 일부는 영등포와 여의도비행장 방면으로 진출하였습니다. 한편 미군 제7사단과 한국군 제17연대는 서빙고 방면을 공격, 서울의 동쪽을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으며, 그 일부는 시흥·안양·수원 방면으로 진격하여 낙동강전선에 있는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였습니다. 9 19일 행주 방면에서 강습도하를 감행한 한·미해병대는 행주산성을 점령하고, 21일 수색을 지나 서울의 서쪽을 감싸고 있는 안산·연희고지 일대로 진격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서울방어사령관을 북한군 1사단장 최광 소장에서 민족보위상 최용건 대장으로 격상시키면서 필사적으로 서울 사수를 노렸지만 이미 병력 과반수가 낙동강 전선으로 몰려 있어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유엔군과 국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MC : 결국 북한의 남침전쟁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승패가 갈렸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안찬일: 그렇습니다. 애초에 일어나서는 안되는 전쟁이었지만 김일성이란 미숙한 지도자는 순간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가 현대적 무기를 갖춘 유엔군과 국군에 앙갚음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그 교훈을 망각한 북한 정권은 다시 한반도에서 핵전쟁의 불구름을 몰고 오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MC :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안 박사님 고맙습니다

 

안찬일: 네 수고하셨습니다.

 

MC: 저희는 다음 주에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기자 홍알벗, 데스크 이진서,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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