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민정권의 흑역사를 말한다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21-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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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인민정권의 흑역사를 말한다 북한 정권수립 기념일(9·9절) 73주년을 하루 앞둔 8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북한 기정동에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다.
/연합뉴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 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9월 9일은 북한 인민정권의 창립일입니다. 그리고 UN에 가입한 북한의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입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민주주의도, 인민공화국도 아닌 독재와 세습정권이라고 안찬일 박사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안 박사는 민주주의 정권이 되려면 최소한 몇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우선 통치기구 즉 국무위원장을 인민대중이 직접 선출해야 합니다. 북한의 정권기관 대표들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인민들이 직접 선거로 뽑아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은 어떻습니까? 오늘 창립 73돌을 맞이하는 북한 정권의 최고지도자는 선거가 아닌 세습에 의한 봉건적 방식으로 선출되었으며 인민의 대표라고 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노동당 조직지도부가 임명하고 인민들은 선거장에 몰려가 형식적 투표나 하는 전근대적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북한 정권의 역사는 한 마디로 출발은 인민정권일지언정 그 과정은 세습과 독재로 점철된 흑역사라고 단정 지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해서 오늘 이 시간에는 “북한 정권의 흑역사를 말한다”이런 제목으로 안찬일 박사와 이야기 나눕니다.

안찬일 박사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잘 지냈습니다.

질문 1): 먼저 북한 정권의 창립 초기 북한의 정세부터 좀 이야기 듣고 본격적인 대담을 시작할까요?

안찬일: 가슴 아프게도 한반도의 광복은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연합국에 의해 주어진 하나의 ‘선물’로 차례졌습니다. 일제의 무장해제를 위해 북한 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쪽 지역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양분되게 됩니다. 소련군의 진주는 단순한 군사적 진주라기보다 북한 지역에 소베트 정권을 수립하려는 모스크바의 음흉한 계획에 따라 강행되었습니다. 소련군은 진주하는 순간부터 북한 각지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소베트화의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물론 인민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민위원회라면 그걸 반대할 사람은 북한에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북한 지역에서는 사유화가 말살되고 오직 공산당의 중앙집권적인 통치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반민주주의 흑역사가 개막되었다는 것입니다. 북한에 초기 등장한 인민위원회는 닥치는 대로 몰수하고 닥치는 대로 처형하는 하나의 폭력집단이었습니다. 거기에 스탈린식 전체주의 정치문화가 그대로 이식되면서 김일성이란 존재를 우상화하는 개인숭배의 종교적 지배가 횡행하다보니 인민위원회는 옷만 갈아입은 일본 식민지통치기구, 즉 제2의 총독부나 다름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남쪽으로 월남의 길을 떠나고, 심지어 종교인들을 비롯한 전체주의 폭거에 저항하는 양심적 인사들은 시베리아로 유배까지 떠나야 했습니다. 과연 이걸 누가 진정한 해방이고 광복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 2):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1946년 2월 8일 이른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을 사실상 북한 정권 수립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안 박사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안찬일: 당연히 저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광복 직후 1년도 채 안 되어 1946년 2월 8일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북한 전 지역을 통치하는 말 그대로 ‘인민정권’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인민정권이 행한 정책들을 보면 북한 정권의 흑역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설립 즉시 두 달도 안 돼 4월 5일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산업국유화 법령’을 발표하면서 인민의 재산을 강제 몰수하고 경제산업 시설들을 정복하는 일들을 벌여 나갔다는 것입니다.
사회개혁은 순서가 있고 인민대중의 존중 속에 이루어져야 민주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붉은 완장을 두르고 인민들이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재산을 빼앗아가는 행위는 말 그대로 강도짓이지 개혁이 아닙니다. 이때부터 북한의 인민정권은 인민을 위한 정권이 아닌 통치자 소수를 위한 독재기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꼭 1년 후인 1947년 2월 8일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간판을 바꾸어 달고 정권수립의 고공행진을 가속화하게 됩니다.

질문 3): 아, 그렇군요. 그런데 북한 정권은 1948년 9월 9일 정권수립 선포 이전에 이른바 전국적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치러 마치 자신들의 정권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권인 것처럼 위장하게 되는데 그 실상도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안찬일: 네 그 흑역사는 참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1948년 7월 중순경부터 남한 전역에서 남로당이 주도한 지하선거가 있었는데, 이는 북한 정권수립을 위한 전초작업이었습니다. 북한 김일성은 1948년 4월 19일 제1차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고, "통일된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하여 조선헌법을 제정하고 통일된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948년 6월 29일부터 제2차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하고 "앞으로 세워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통일정부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선거도 남, 북한에서 실시하기로 했는데, 이때 남한에 있던 김구와 김규식 선생은 제1차 연석회의에는 김일성의 초청을 받고 참석했으나 제2차 회의에는 "국토양단과 민족분열을 막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북한에서도 단정을 하겠다는 것은 민족분열행위"라고 비판하면서 불참했습니다. 한편 1947년 11월 유엔총회가 한반도 전역에서 유엔 감시하에 자유 총선을 실시하여 남북한 통일정부를 구성하라는 결의를 채택했고, 1948년 1월 초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서울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소련의 지시대로 유엔위원단의 방북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전구적인 규모의 '2·7투쟁'을 일으켜 유엔위원단의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이 투쟁의 실체는 파업·폭동·무장테러였지요. 문제는 형식적인 남로당과 북로당의 사기극이었습니다. 남로당은 현실적으로 남쪽지역에서의 선거가 불가능함으로 2중 선거를 실시하기로 했습니다. 즉 남쪽의 각 시, 군에서 5~7명의 대표자를 선출하고 선출된 대표자들이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를 열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지하선거란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할 남측대표자 1,080명을 뽑는 선거였습니다. 이중 수백 명이 해주에 직접 올라가 형식적인 선거를 치르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했다는 식이었습니다.

질문 4): 그 후 북한 정권은 6.25 남침전쟁을 도발하여 영구분단의 비극을 초래하고 북한에서 오늘날 최악의 고난의 행군을 불러왔습니다. 앞으로 북한 정권의 미래도 진단해 주시지요.

안찬일: 저는 개인적으로 북한 정권은 미래가 없다고 단정합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43년 전에 개혁과 개방을 선언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걸음으로써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거의 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세습 독재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민들은 일본 때보다 못한 가난과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정권은 있되 정책이 없고, 통치자가 있되 인민대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전대미문의 북한 정권은 즉시 사라져야 합니다. 북한 정권의 존속이 연장될수록 북한 인민대중의 고통과 굶주림도 연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북한의 반인민적 정권의 종말을 재촉해 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안찬일: 네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MUSIC

지금까지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안찬일 박사와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기자 이현기,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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