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권력이나 무력보다도 글의 힘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하는데요.
그런데 글의 힘만큼 강력하게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음악의 힘입니다.
언어와 국경을 넘어 사람을 하나로 연결하는 강력한 음악의 힘을 직접 경험하는 사람들을 만나봤는데요.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운영 중인 ‘아코디언 교실’ 수강생들입니다. <여기는 서울> 지난 시간에 이어 그 현장, 전해드립니다.
(현장음: 아코디언 교실)듣고 하려고 하지 마세요. 악보를 보면서 해야 정확히 할 수 있어요. 들어보세요. (아코디언 소리) 맞습니까? (아코디언 소리) 맞습니까? 맞아요? / 아니요. 틀려요. / 뭐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틀린 것 같죠? 쿵 따다 쿵 따다 따따딴 이 매듭이 정확하게 안 들어간 거에요~~
지난 3월 16일부터 매주 토요일이면 남북통합문화센터에 아코디언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오전엔 심화반 교실 수강생 15명이, 오후엔 기초반 교실 수강생 15명이 한 자리에 모여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는데요. 이 아코디언 소리는 11월까지 계속될 예정입니다.
(인터뷰-담당자)남북통합문화센터 통합체험팀에서 일하는 아코디언 담당자 나영선 연구원입니다. 저희가 두 과정으로 운영하고 있는데요. 1 과정은 3월 16일에 시작해서 7월 6일까지 16주 과정으로 운영합니다. 그리고 2주 정도 쉰 다음에 2 과정으로 7월 27일에 개강을 해서 11월 16일에 끝나는 일정으로 기획했습니다.
3월부터 11월까지 교육받고, 중간에 2주 간의 짧은 방학까지 있는 교육 일정만 보면 흡사 학교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코디언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교원 출신의 아코디언 전문가입니다.
(인터뷰-강사)안녕하십니까. 저는 이효주라고 합니다. 작년부터 (아코디언 강습을) 시작했는데요. 북한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했고 음악 교사로 한 17년을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발탁된 것 같습니다. 제가 배운 게 음악이니까 가르치는 게 너무 즐겁습니다. 또 남북한 주민들이 함께하는 이런 자리가 어디 쉽게 마련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너무 좋습니다.
2011년, 한국에 정착한 이효주 씨는 한국에서도 학교 교원이 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찮았습니다. 한국에서 다시 시험을 통과해야 교단에 설 수 있는데 효주 씨는 7살, 9살 된 두 자녀와 함께 입국했기에 자식들을 키우는데 전념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식당에서 일했고 2012년 전쟁기념관 박물관에서 북한 교육 전문 강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에 응시해, 채용됐습니다. 효주 씨는 그곳에서 10년 동안 근무했다는데요. 관람객들에게 북한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열심히 했답니다.

(인터뷰-강사)전쟁기념관에서 근무하다 보니까 제가 그냥 북한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기에는 저의 지식이 조금 모자란다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석사과정, 사회 문화 언론을 전공했어요. 북한에 대해서 그냥 진솔하게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요. 작년에 수료했습니다. 아! 이제는 졸업 시험까지 다 마쳤네요. (웃음)
북한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효주 씨는 아코디언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는데요. 그 때문인지 효주 씨의 강의가 가장 인기가 좋았다고 하네요. 북한 사범대에서 아코디언을 전공한 효주 씨의 실력은 들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데요. 효주 씨는 자신의 재능을 활용해 봉사 활동에도 참여합니다. 주말이면 아코디언으로 다양한 곳에서 봉사 활동하는데 지난해부터 남북 통합문화센터와도 인연이 닿았습니다.
(인터뷰-강사)제가 작년에 해봤지 않습니까? 그런데 작년에 아코디언을 도레미파도 모르던 분이 오셨는데 지금은 공연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이런 데서 (제가) 북한에서 느꼈던 교원의 자긍심, 긍지 이런 걸 요즘에 와서 느낍니다. 사실 대한민국은 아코디언의 수요자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코디언 연주나 그런 것이 위축됐었는데 이 수업으로 그 맥이 살아난 거죠. 지금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오늘도 한 명이 공연 때문에 못 온다고 문자가 왔던데 그분도 이제 아코디언 연주로 공연하더라고요. 북한에서 많이 쓰이는 아코디언이 대한민국에서도, 우리 남북한 주민들이 함께 이렇게 되살려준다는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한에서는 추억의 악기로 여겨졌던 아코디언이지만 이젠 수강생들에게는 꿈을 꾸게 하는 고마운 악기입니다. 특히 이분은 아코디언을 배우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됐다는데요. 어떤 희망일까요? 직접 들어보시죠.
(인터뷰-수강생)북한에서 온 윤향순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먹고 살기 각박하고 마음의 상처도 많고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많아요. (아코디언은)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기타나 피아노 등 뭔가를 할 때 나도 그들에게 빠지지 않고 뭔가를 취미생활로 할 수 있다는 그런 정도? 그걸 바라고 하고 있어요. 지난해 2003년도 3월부터 시작했으니 두 학기 하고 지금 세 번째 학기 수업을 듣고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많이 주저했는데 해보니까 사람들 앞에서 연주해 볼까 하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향순 씨는 한국 정착 20년 차이지만 마땅한 취미생활도 없이 일만 하면서 지냈답니다. 북에 남겨진 자식들에게 미안해서였다는데요. 겉보기엔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서울 구경 한번 제대로 못 해본 향순 씨입니다. 그런 향순 씨에게 한 친구가 아코디언을 배워보라고 권했습니다.
(인터뷰-수강생)북한에 두 아이를 두고 왔어요. 그래서 내가 돈을 벌어서 애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해서 죽기 살기로 돈을 벌어야 된다, 오로지 그 목표였죠. (그러다 보니) 제가 일하는 것 외에는 취미 생활을 못 해 봤어요. 경제적인 활동 외에 사회 활동이 없다 보니까 친구를 만들고, 만나고 하는 것도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아코디언을 배움으로 해서 자신감도 생기고 그로 인해 소통도 하고 있습니다. 음악으로 내가 더 한국 분들하고 잘 융합돼 더 가깝게 소통할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아코디언은 생전 처음이었지만 음악은 제가 북한에서 6년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기초는 좀 있어요. 악보 볼 줄 알고 그런 정도는 되니까 남들보다 악보를 익히고 하는 건 좀 빠르겠죠. 그래서 제 지금 소소한 목표는 공원에라도 가서 버스킹을 할 수 있을까… 그걸 바라고 연습합니다.
향순 씨의 희망은 버스킹 즉 거리 공연입니다. 공원에서 쉬던 사람들이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향순 씨 옆으로 모여드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는데요. 향순 씨는 자신이 아코디언을 통해 느끼게 된 감정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답니다.
(인터뷰-수강생)매일과 같이 느끼는데 음악이라는 게 신비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솔직히 우리 사람들뿐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요. 사업하는 데서는 불편해도 봐야 되는 상황이지만 이런 데서는 불편하면 안 보면 되지, 이렇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마저도 같이 소통을 쉽게 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대하기가 어렵다 싶었던 분들 하고도 아코디언을 같이 하면서 쉽게 소통하게 되고… 그래서 '아, 이게 힘이 참 강하구나' 하는 걸 많이 느꼈어요. 정말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많은 사람들이 가졌으면... 그러면 제가 느낄 수 있는 걸 그네들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이 있어요.
-Closing Music-
건반으로 누르며 소리 내는 것부터 시작한 아코디언 수업은 어느덧 화음을 익히고 곧 온전한 한 곡의 합주를 완성할 겁니다. 남북 사람들이 함께하는 아코디언 연주, 아름다울 그 순간을 기대하겠습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