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달러 들고 미국 유학 온 황문규 목사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4-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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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규 씨는 1947년 16세 소년으로 월남한 후, 1954년에 1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 길에 올랐던 장본인이다. 유복했던 가정에서 자란 황문규 씨는 유년 시절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는 병을 앓게 된다. 압록강 얼음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세 차례 먹고 세균감염에 걸린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의술을 통해서라도 아이를 살려보려 했던 부모님도 포기할 수밖에 없던 무렵, 한 권사님이 찾아와 병을 고친다. 홀로 월남한 황 씨는 미군 통역병으로 일하게 되고, 그곳에서 동료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라 미국 여성과 결혼하고, 목회자로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황문규 목사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꿈 따라 사명 따라 사랑 따라’ 책을 한국어, 영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최근에 중국어로도 발간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황문규 목사 부부.
황문규 목사 부부. 사진 제공- 황문규 목사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16살 나이에 홀로 월남해 고학생으로 학업 한 일과 한국전쟁 중 미 해병대 통역과 이어 미국으로의 유학 등에 얽힌 황문규 목사의 이야기로 함께한다.


황문규 목사는 지금부터 만 60년 전에 미국에 왔단다.

황문규: 미국 이름은 매튜 황, 마태 황입니다. 제가 1954년도에 6.25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에 와 공부를 마치고, 당시에는 한국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미국 교회에서 목회하고 또 후에 한인교회에서도 담임하고 또 남미에 가서 선교도 하고 그 후에 은퇴 나이가 되어 은퇴하면서 대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고 또 지금은 세선회라고 한국에 있는 세선회(Sehsun Global Mission )와 함께 선교하면서 저는 미주 세선회 회장으로서 지금 세계 여러 나라 다니면서 설교하고 강연합니다.


황문규 목사의 자선 전 ‘꿈 따라 사랑 따라 사명 따라’ 제목의 책에 대한 이야기다.

황문규: 제 특징은 미국에 올 수 없는 상태였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준비해 보내셨고, 미국에서 공부를 다 마친 다음에 선교하는데 4개국어로 남미에서 선교했고, 세계 여러 나라 다니면서 지금까지 복음 전하고 있습니다. 저에 미국에 온 배경이 특별하기 때문에, 제 경험이 특수하기 때문에 다문화 목회와 선교하면서 제가 쓴 책이 있습니다. 4권의 책을 썼는데요. 하나는 한인 이민교회 선교의 목적과 선교의 사명에 관한 책을 썼고, 그 다음에는 ‘꿈 따라 사랑 따라 사명 따라’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것은 제가 미국에서 50-60년간 살면서 자서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어판으로 POWER OF DREAM, LOVE, MISSION이란 제목으로 출판됐고요. 영어로 쓴 책이 2년 전에 미국에서 제일 큰 종교잡지인 ‘월드’에 톱 10에 선정이 됐습니다. 이것이 또한 남미의 포르투갈어로 번역이 되었고 최근에 중국에서 중국어로 번역되어서 막 출판되었습니다.

황문규 목사는 홀로 월남해 625 전쟁을 겪었단다.

황문규: 8.15 전에는 남북한 사이 삼팔선이 없었지만 저희 집은 신의주 근처에 있는 용천, 용암포입니다. 용암포에서 진거지라는 압록강 해구와 황해바다에 가까운 데서 났는데요. 거기서 부잣집에 외아들로 태어나서요. 6.25 사변 전에 월남하는 데 그만 우리 부모님은 월남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잡히신 거지요. 그래서 나오시지 못하고 저 혼자 나왔어요. 그때 제가 16살이었는데 부모님을 기다리면서 서울 대광고등학교에서 고학을 하고 있는데 그때 6.25사변이 일어났습니다.

황문규 씨는 6.25전쟁 중 미 해병대 통역으로 일하며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황문규: 6.25사변이 났는데 참 하나님께서 저를 미 해병대에 통역으로 인도해 주시데요. 제가 미 해병대에서 통역으로 근무할 때에 젊은 미국 군인을 만났어요. 그분이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온 사람인데, 그때 내 나이가 21살인데, 마이클 해글이라는 친구가 저를 사랑하고 친철히 대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의 어머니가 저를 미국에 올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왜 저를 아껴줬는지 아직도 이유를 몰라요. 나는 뭐 노래를 잘 불러서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통역도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하여간 하나님께서 그 친구에게 나를 도울 수 있도록 그렇게 인도하셨어요.

황문규 씨가 미국에 올 때 단독 1달러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황문규: 그때 1954년이면 6.25전쟁이 막 끝나는 때인데 제가 피난민 고학생이니까? 돈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때 미국에 오는데 비행기 표 값도 하나님께서 다 주시데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데 거 하늘에서 날려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인편을 통해 주시는데 아주 재미있게도 하나님께서 돈을 주시는데 꼭 비행기 표에 맞는 돈을 주시데요. 그래 제가 미국에 도착했는데 제 호주머니에 얼마 남았나 하면 1달러가 남았어요. 그 1달러를 가지고 미국에서 대학도 마치고 신학도 마쳤어요.

황문규 목사는 1963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단다. 결혼도 하고 남미로 선교 가게 된단다. 황문규: 1963년도가 저에게는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왜냐면 5월에 신학대학원을 막 마치고 6월에 결혼했어요. 7월에 목사 안수 받고 미국교회에 담임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그때는 미국에 한국 유학생들이 있긴 있었지만, 많지 않았어요. 그런 관계로 미국 여자와 결혼하게 됐어요. 그리고 결혼하면서 7월에 버지니아 주 노폭시에 있는 웨스트 민스터 미국 장로교회 담임 목사로 시작했어요. 거기서 몇 년 동안 담임하면서 자리를 잘 잡고 있는데 그때 유명한 목사님인데 오스월드 J 스미스라는 목사님이 왜 96퍼센트의 목사들이 북미에 다 남아서 있느냐! 이것은 나에게 하는 이야기다. 나는 미국에 없어도 미국사람들은 뭐 복음을 듣고 다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래서 이제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에 가야겠다 해서 저희 부부가 기도하면서 선교를 가기로 했어요.

1967년에 브라질 한인들을 위해 목회를 하게 된다.

황문규: 그때 브라질에 문이 열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브라질에 갔는데, 갈 때는 브라질 교회를 위해서 갔어요. 그런데 가서 보니까? 한국에서 막 이민자들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1967년도에 브라질에 갔어요. 그래서 우리 선교부에서 황 목사를 이왕이면 브라질 교회 대신에 한인교회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교할 수 있도록 하자해서 그래 저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상파울루에 우리 가족을 보냈어요.

브라질에서 4개국어로 설교했다고 한다.

황문규: 한국의 사정이 그때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거의 전부 다 빈손으로 왔어요. 이민자들을 상대로 해서 선교를 했습니다. 상파울루는 마치 뉴욕과 같이 80여 나라의 민족들이 와서 사는 국제도시입니다. 그래 거기서 제가 4개국 언어로 열심히 아주 많은 일을 할 수가 있었어요. 영어는 국제어이니까? 영어만 쓰면 어느 교회 가서도 설교할 수가 있어요. 그래 영어로 설교했고, 그다음에 제가 한국사람이니까? 한국말로 설교했고요. 그다음에 브라질에서는 스페니쉬를 쓰지 않고 포르투갈어를 쓰는데 우리가 거기서 포르투갈어를 공부해서 포르투갈어로 설교하고 그다음에는 일본말을 공부해서 상파울루에 일본교회가 17개 있는데 그래 일본 교회에 가서도 설교하고요.

황문규 목사는 1979년에 다시 미국에 와 한인교회와 미국교회에서 섬기게 된다.

황문규: 미국은 존슨 대통령 때에 이민법이 개정되어서 한국에서 미국에 많이 이민 오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브라질 선교는 이만큼 하고 미국에 가서 선교해야겠다 해서 12년 후에 1979년도에 다시 미국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제가 하던 공부 목회학 박사를 마치고 그다음에는 한국교회를 한 10여 년 동안 담임하고요. 그다음 다시 미국교회에서 한 6년 동안 담임하다가 1995년에 은퇴를 하고 그 후에 대학에서 가르치고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치면서 미주 세선회를 시작해서 선교한 것이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월남한 사람들이 한국에서 만든 세선회와 동참하며 미주 세선회 대표로 활동한다.

황문규: 한국에서 세선회가 시작할 때에 특징은 몇 명의 장로들이 우리가 북한에서 빈손으로 나와서 비즈니스를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았는데 이제 계속해서 돈만 벌다가 이 세상을 떠나면 무슨 가치가 있느냐! 우리가 이제는 선교를 좀 하자!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한국의 세선회 입니다. 한국에서는 세선회가 여러 나라에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세선회에서 주동이 된 사람 가운데 특별히 김철우 장로가 있는데 이 친구는 저와 대광고등학교에서 어려운 고생 하면서 같이 공부한 친구인데요. 그래 한국에 세선회에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미국 지부로서 미주 세선회를 1997년도에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미주 세선회를 대표해서 세계 여러 나라를 상대로 선교하고 있습니다.

황문규 목사는 지금도 세계 선교의 열정으로 활동하고 있다.

황문규: 처음에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7만명 살고 있었는데 그 7만 명을 위해서 세선 상담 연구소를 시작해서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필요한 상담을 했습니다. 그밖에 주로 한 것은 중남미를 초점을 두고 중남미에서 가난한 지도자들을 신학교육을 하기도 했어요.

한국 세선회 활동에 대한 이야기다.

황문규: 제가 연도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경직 목사님이 템플턴 국제 종교 상을 받으면서 100만 달러 이상을 받았어요. 그때에 사랑의 쌀이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한경직 목사님이 자금을 많이 댔는데 그때 사랑의 쌀은 중국과 몽골 그 밖의 나라에 주면서 세선회가 시작하는 동기가 됐어요. 그래서 한국의 세선회는 여러 나라에 교회도 세우고 대학도 세우고요. 몽골대학도 세웠고 지금은 타일랜드에 최근에 대학을 세우는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하고 있어요.

황문규 목사가 어린 시절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 듣는다.

황문규: 저는 원래 믿지 않은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모도 믿지 않고 그런데 제가 먼저 교회에 나가서 어려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14살 났을 때이니까? 해방되기 바로 1년 전인데 1944년에 제가 신의주에서 동중학교를 다니면서 거기서 빙수 얼음 사탕을 몹시 더운 날 세 그릇을 사 먹었어요. 사 먹고 그 자리에서 설사하면서 병이 났는데 어떻게 심했던지 의사들이 아무리 고치려 해도 낫지를 않았어요. 의사들이 손을 버쩍 들었는데 너무 심해지니까? 우리 부모님이 용천의 고향 집에 데리고 가셨어요. 이왕 죽을 바에야 시골 조용한 곳에서 죽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왔는데 그때 제가 다니던 교회가 중흥교회라고 거기서 교인들이 나를 위해서 열심으로 기도하는데 그때 어떤 일이 생겼느냐면, 기도로서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은 권사님이 자기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너 저기 어데 중흥교회라는 곳에 가라! 그래서 왜 가라는 줄도 모르고 순종해서 지금까지 와보지 못한 중흥교회에 왔어요. 몇 시간 걸려서요. 배를 타고요. 와보니 한 장로가 우리 조카가 죽게 됐는데 거기가서 기도해 주세요. 그래 우리 집에 와서 기도하는데 그분의 기도로서 또 전 교인들도 기도하고 있는데 하루 저녁에 저를 고쳐 주시는데 그때 예수님이 직접 저에게 오셨어요. 내 병석에 예수님이 나타나시면서 내 그 쑤시고 아프던 그 병이 마치 스위치를 누르면 밤에 흑암이 도망가고 빛이 비추는 것처럼 내 그렇게 아프고 쑤시던 병이 싹 났데요.

황문규 목사가 가장 바라는 것은 자신 고향 용천에 있는 중흥교회에서 설교하고 싶다고 말한다.

황문규: 우리 한국이 130여 년 전에는 교회가 하나 없는 캄캄한 나라였어요. 그런데 1882년에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면서, 즉 다시 말하면 복음이 한국에 오면서 한국이 이렇게 오늘날 세계적인 밝은 나라가 됐지요. 그래 저는 믿기를 어느 나라나 복음을 주면 그 나라는 반드시 잘 산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제 북한이 열리면 저는 북한에 가서 여러 곳에 가서 설교하고 특별히 고향에 가서 간증설교를 하고 싶은 것이 저의 꿈입니다.

지구촌의 한인들 오늘은 16살 나이에 홀로 월남해 고학생으로 학업한 일과 한국전쟁 중 미 해병대 통역과 이어 미국으로의 유학 등에 얽힌 황문규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지금까지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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