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로 세상을 만나다] 김용환 인도한인회 사무국장-북한 "힌디어 배워라" 김일성대 교수 파견
워싱턴-노정민 nohj@rfa.org
2009.02.17
2009.02.17
최근 인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도의 공용어인 힌디어를 가르치기 위해 북한의 대학 교수가 직접 언어를 공부하기도 하는데요, 전화로 세상을 만나다, 오늘은 인도의 수도 뉴델리로 가보겠습니다.
기자: 요즘 인도의 날씨는 어떻습니까?
김용환 씨(재인도한인회 사무국장): 네, 뉴델리의 요즘 날씨는 일 년 중 제일 좋을 때고, 낮 최고 기온이 22도 정도, 저녁에는 10도 정도로 한국의 초가을 날씨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기자: 인도에는 한국인이 얼마나 살고 있나요?
김용환 씨: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약 3천 5백 명 정도 있고, 인도 전역에는 약 7천에서 8천 명 정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많이 진출을 해 있는데요, 그곳의 주재원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또 여기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 선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학생들입니다.
인도는 정보 산업, 즉 IT 강국이고, 한국의 유명한 기업인 삼성, LG, 현대가 인도에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곳의 한인들이 하는 자영업은 주로 식당이나 숙박업소를 많이 하고 있죠.
기자: 인도에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있잖아요. 신분에 따라 차별을 받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김용환 씨: 네, 인도는 헌법을 통해서 신분에 의한 차별은 폐지했습니다. 그런데 관습이다 보니까 도시 지역은 조금 덜한데 시골로 갈수록 차별은 상당히 심합니다. 한 예를 들면, 도시에서 잘 사는 집안에는 보모가 있습니다.
외식을 할 때 보모도 같이 나가는데 식당에서 절대로 같이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보모는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공유하지 않고, 음식이 남더라도 절대 주지 않습니다. 이게 제일 손쉽게 볼 수 있는 차별의 모습인 것 같아요.
기자: 관습으로 남아있는 신분 차별이 개선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나요?
김용환 씨: 아무래도 90년 대 인도가 개방된 후부터 서구 문명이 많이 들어와서 젊은 층에서는 많은 의식 변화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이 있어요. 인도에서 제일 낮은 신분의 소년이 제일 높은 신분의 소녀를 사귀게 됐어요. 그걸 알게 된 소녀의 할아버지가 소년 부모의 동의를 얻어서 두 명 다 화형을 시켰습니다.
이 일이 인도에서 큰 화제가 됐는데,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제재도 안했고, 법원에서도 판결하기가 애매하다...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인도가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북한과 인도 간에 교류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북한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김용환 씨: 네, 뉴델리에서 외국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에 가면 가끔 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경우만 말씀드리면 이곳에 북한 대사관이 있기 때문에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볼 수가 있죠.
제가 만난 북한 사람 중에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이 있는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일성 대학교의 영문학과 교수님이에요. 북한에서도 인도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인도의 힌디어를 배워서 나중에 돌아가면 힌디어를 가르치게 돼있다고 합니다.
인도의 공용어 중 하나로 힌디어가 있는데, 제일 많이 쓰는 언어입니다. 그것을 배워서 북한의 대학으로 돌아가 강의를 하게 돼 있다고, 이곳에서 2년 과정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더군요.
북한에서도 인도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고, 그분 말씀이 이전에는 힌디란 언어를 가르친 경우가 없었는데 이번에 자기가 해 보려고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기자: 북한도 정보 산업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데, 인도와 교류는요?
김용환 씨: 인도의 방갈로 지방이 인도 IT 산업의 메카인데요, 북한의 엔지니어 분들이 많이 오셔서 방갈로 지방에서 단체로 일을 하고 계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기자: 인도에 탈북자나, 북한 사람이 정착을 해서 살고 있는지요?
김용환 씨: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도의 이민 역사를 말씀드리면 6.25가 끝난 뒤 비전향 포로들, 그러니까 제 3국으로 가신 분들...그분들이 처음에 오신 나라가 인도입니다. 이민 1세대죠. 당시 세 분이 오셨는데 그 중에 북한 장교까지 지낸 분이 처음 와서 이민 역사가 시작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십니다.
기자: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민 역사군요.
김용환 씨:네. 그리고 탈북자인지 모르겠지만 조선족 아주머니들이 많이 와 계세요.
기자: 북한 사람은 외부인과 접촉은 하나요?
김용환 씨: 거의 안합니다. 그 교수님도 공부만 하시는 편입니다. 학교 자체가 외국인을 상대로 힌디어를 가르치는 학교라서 수업시간 이외에 마주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기자: 요즘 피부로 느끼는 인도의 경제 상황은 어떻습니까?
김용환 씨: 인도 경제는 농업이 제일 크고, 2차 산업보다는 3차 산업인 서비스 산업이 더 발달해 있습니다. 미국과 관계는 안 좋았다가 미국이 인도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서 관계가 좋아졌고, 이전에는 핵발전소가 없었는데 이제는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혀왔습니다.
인도는 빈부 격차가 큰 데다 나라가 크고 인구도 많아서 경제 발전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인도는 외자 유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인도 입장에서는 북한보다는 한국을 협력 대상으로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기업이 많이 와서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 더 가깝다는 여론 조사도 나오고...그래서 북한보다는 한국이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자: 인도라는 세계 속의 한 국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앞으로 펼칠 포부를 말씀해 주세요.
김용환 씨: 일단은 한국 사람이 추진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일본도 포기한 시장에 한국 사람이 들어와서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인도라는 나라에 개인의 이름을 알리는 게 목표구요, 열심히 사업을 해서 인도에서 성공하는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북한도 같은 한민족이니까 같은 추진력을 갖고 있다고 보고, 저희가 성공했으면 북한 사람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도가 개방한 이후 한국은 물론 많은 외국 기업들이 인도에 진출해 성공을 거뒀습니다. 정보 산업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는 북한도 IT 산업의 강국으로 손꼽히는 인도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은데요, 더 많은 교류로 북한의 개방 개혁과 산업의 선진화를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되기를 인도의 현지 한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전화로 세상을 만나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이었습니다.
기자: 요즘 인도의 날씨는 어떻습니까?
김용환 씨(재인도한인회 사무국장): 네, 뉴델리의 요즘 날씨는 일 년 중 제일 좋을 때고, 낮 최고 기온이 22도 정도, 저녁에는 10도 정도로 한국의 초가을 날씨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기자: 인도에는 한국인이 얼마나 살고 있나요?
김용환 씨: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약 3천 5백 명 정도 있고, 인도 전역에는 약 7천에서 8천 명 정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많이 진출을 해 있는데요, 그곳의 주재원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또 여기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 선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학생들입니다.
인도는 정보 산업, 즉 IT 강국이고, 한국의 유명한 기업인 삼성, LG, 현대가 인도에서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이곳의 한인들이 하는 자영업은 주로 식당이나 숙박업소를 많이 하고 있죠.
기자: 인도에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있잖아요. 신분에 따라 차별을 받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김용환 씨: 네, 인도는 헌법을 통해서 신분에 의한 차별은 폐지했습니다. 그런데 관습이다 보니까 도시 지역은 조금 덜한데 시골로 갈수록 차별은 상당히 심합니다. 한 예를 들면, 도시에서 잘 사는 집안에는 보모가 있습니다.
외식을 할 때 보모도 같이 나가는데 식당에서 절대로 같이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보모는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같은 음식을 공유하지 않고, 음식이 남더라도 절대 주지 않습니다. 이게 제일 손쉽게 볼 수 있는 차별의 모습인 것 같아요.
기자: 관습으로 남아있는 신분 차별이 개선되는 모습은 보이지 않나요?
김용환 씨: 아무래도 90년 대 인도가 개방된 후부터 서구 문명이 많이 들어와서 젊은 층에서는 많은 의식 변화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이 있어요. 인도에서 제일 낮은 신분의 소년이 제일 높은 신분의 소녀를 사귀게 됐어요. 그걸 알게 된 소녀의 할아버지가 소년 부모의 동의를 얻어서 두 명 다 화형을 시켰습니다.
이 일이 인도에서 큰 화제가 됐는데,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 제재도 안했고, 법원에서도 판결하기가 애매하다...이런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도 사람들은 자랑스럽게 인도가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북한과 인도 간에 교류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북한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김용환 씨: 네, 뉴델리에서 외국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에 가면 가끔 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경우만 말씀드리면 이곳에 북한 대사관이 있기 때문에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도 볼 수가 있죠.
제가 만난 북한 사람 중에 여기서 공부하시는 분이 있는데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일성 대학교의 영문학과 교수님이에요. 북한에서도 인도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인도의 힌디어를 배워서 나중에 돌아가면 힌디어를 가르치게 돼있다고 합니다.
인도의 공용어 중 하나로 힌디어가 있는데, 제일 많이 쓰는 언어입니다. 그것을 배워서 북한의 대학으로 돌아가 강의를 하게 돼 있다고, 이곳에서 2년 과정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계시더군요.
북한에서도 인도에 관심을 보이는 것 같고, 그분 말씀이 이전에는 힌디란 언어를 가르친 경우가 없었는데 이번에 자기가 해 보려고 나왔다고 하더라구요.
기자: 북한도 정보 산업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데, 인도와 교류는요?
김용환 씨: 인도의 방갈로 지방이 인도 IT 산업의 메카인데요, 북한의 엔지니어 분들이 많이 오셔서 방갈로 지방에서 단체로 일을 하고 계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기자: 인도에 탈북자나, 북한 사람이 정착을 해서 살고 있는지요?
김용환 씨: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도의 이민 역사를 말씀드리면 6.25가 끝난 뒤 비전향 포로들, 그러니까 제 3국으로 가신 분들...그분들이 처음에 오신 나라가 인도입니다. 이민 1세대죠. 당시 세 분이 오셨는데 그 중에 북한 장교까지 지낸 분이 처음 와서 이민 역사가 시작됐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계십니다.
기자: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민 역사군요.
김용환 씨:네. 그리고 탈북자인지 모르겠지만 조선족 아주머니들이 많이 와 계세요.
기자: 북한 사람은 외부인과 접촉은 하나요?
김용환 씨: 거의 안합니다. 그 교수님도 공부만 하시는 편입니다. 학교 자체가 외국인을 상대로 힌디어를 가르치는 학교라서 수업시간 이외에 마주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기자: 요즘 피부로 느끼는 인도의 경제 상황은 어떻습니까?
김용환 씨: 인도 경제는 농업이 제일 크고, 2차 산업보다는 3차 산업인 서비스 산업이 더 발달해 있습니다. 미국과 관계는 안 좋았다가 미국이 인도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서 관계가 좋아졌고, 이전에는 핵발전소가 없었는데 이제는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혀왔습니다.
인도는 빈부 격차가 큰 데다 나라가 크고 인구도 많아서 경제 발전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인도는 외자 유치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인도 입장에서는 북한보다는 한국을 협력 대상으로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 기업이 많이 와서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과 더 가깝다는 여론 조사도 나오고...그래서 북한보다는 한국이 더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기자: 인도라는 세계 속의 한 국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앞으로 펼칠 포부를 말씀해 주세요.
김용환 씨: 일단은 한국 사람이 추진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일본도 포기한 시장에 한국 사람이 들어와서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인도라는 나라에 개인의 이름을 알리는 게 목표구요, 열심히 사업을 해서 인도에서 성공하는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입니다. 북한도 같은 한민족이니까 같은 추진력을 갖고 있다고 보고, 저희가 성공했으면 북한 사람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도가 개방한 이후 한국은 물론 많은 외국 기업들이 인도에 진출해 성공을 거뒀습니다. 정보 산업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인정받는 북한도 IT 산업의 강국으로 손꼽히는 인도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은데요, 더 많은 교류로 북한의 개방 개혁과 산업의 선진화를 앞당기는 데 도움이 되기를 인도의 현지 한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전화로 세상을 만나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