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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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동북공정 세 번째 순서에서는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반도 북부와 만주 그리고 연해주지역까지 걸치는 대왕국을 건설해 230년간 존속했던 발해가 중국의 지방민족 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주장과 그에 대한 한국의 발해사 전문학자의 반론을 알아봤습니다. 오늘은 한국사의 뿌리인 고조선이 중국 민족에서 비롯됐다는 동북공정의 주장과 이에 대한 한국 고조선사에 관한 대표적인 학자의 반론을 알아봅니다.

고려 후기에 쓰여진 삼국유사 등 한국의 역사서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현재 중국의 요녕성이나 평양 부근을 중심으로 세워진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현재 중국의 요하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며 세력을 뻗쳤습니다. 2천2백여년간을 존속하다 기원전 108년에 중국 한나라 무제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고 한나라는 조선땅에 한사군을 설치해 지배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한사군은 점차 세력이 약해졌고 급기야 고구려의 침공을 받아 없어졌습니다.

고조선은 역사서 마다 다르긴 하지만 통치 왕조에 따라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이렇게 세 조선으로 구분합니다. 고려시대 후기 고승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1500년간 존속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왕조인 위만조선이 80여년간 조선을 통치한 것으로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중간에 있었다는 기자조선은 750년 동안 존속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현재 한국 역사학계는 대체로 기자조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북공정이 주장하는 고조선의 중국 역사 논란의 핵심은 바로 이 기자조선의 존재여부에 대한 역사 논쟁입니다.

중국 동북공정학자들은 고조선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한반도에 가서 세운 것이기 때문에 고조선 역시 중국의 역사라는 논리입니다. 이른바 기자동래설로 잘 알려진 기자조선의 건국과정은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 한서, 상서대전등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기원전 12세기경,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패망하자 은나라 왕의 태사, 즉 원로 자문관이었던 ‘기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5천명의 은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고조선의 영토로 망명해 나라를 세웠는데 이 나라가 바로 기자조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고조선사연구회 회장이며 단국대학교에서 고조선사를 가르치고 있는 서영수 교수는 기자동래설은 한나라 당시의 또 다른 역사왜곡에 불구하다고 주장합니다.

서영수: 기자는 조선에 온 적이 없다.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중국의 문헌중에 선 ‘진’ 시대 [진나라 이전의 중국 상고시대]에는 기자가 조선에 왔다는 기록이 하나도 안 나온다. 기자 얘기 따로, 조선 얘기 따로 나온다. 그래서 관자라든지 전국책이라든지 여러 가지 기록에는 조선은 요서 요동지역의 국가로 기술하고 있고 기자는 하남성, 은나라와 관련된 것으로만 나오는데 이것이 한나라 초기에 와서는 갑자기 두 개의 기록이 기자가 조선에 봉해졌다는 기록으로 바뀐다.

기록이 바뀌게 되는 이유는 조선의 세력이 강해지는데 위협을 느낀 한나라가 지금의 중국 동북공정처럼 역사를 각색해서 왜곡을 한 결과라고 서 교수는 주장합니다. 서 교수는 기자동래설을 부인하는 또 다른 근거로 기자의 출신국인 은나라 문화 흔적이 고조선 땅에는 남아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서영수: [중국측은] 이미 은나라 시대 때부터 한반도 전체가 은나라의 속국이었다고 견강부회식으로 주장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은.상 시대의 문화가 한반도에서 발견돼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반도에서 은나라 문화가 발견된 적은 한번 도 없다. 따라서 그들의 얘기는 모두 허구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고조선의 국가로서의 독자성은 진나라 한나라 연나라등 중국의 역대 국가들과 전쟁도 치르고 무역도 해왔던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서영수 교수는 설명합니다.

서영수: 조선은 오늘날 요동 요서지역에서부터 대동강지역까지에 위치하면서 중국과 무역 교역을 해왔었고 때에 따라서는 전쟁도 하고 외교도 하던 국가인데 그 성격은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 문화 양상도 중국 기록에 표현된 바에 따르면 [중국 것과] 다르고, 교역품의 경우도 예를 들어 문피라고 해서 호랑이 가죽 같은 것을 고가로 중국에 팔았다. 중국도 [고조선] 문화의 독자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발해 역사 왜곡 논란과 마찬가지로 고조선사에 대한 논란 역시 고구려사만큼 분명하게 어느 쪽이 옳다고 주장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고조선 왕조 자체의 역사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고조선이 처음으로 한국이 역사에 등장하는 고려 충렬왕때 쓰여진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이 도읍한지 1500년이 지나, 중국에서 기자가 동래하여, 즉 동쪽으로 와서 임금이 되고, 단군은 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중국 역사서의 기자동래설을 확인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 고려시대와 이씨 조선시대에서도 기자동래설을 사실로 인정했고 국가에서 기자묘를 세우고 숭배한 기록이 있습니다.

워싱턴-전수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