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KGB와 공작원들 (3)
2019.12.31
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 교수님, 지난 시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인 영국 캠브릿지대학을 졸업한 영국 최고 엘리트 5명이 공산주의를 믿고, 소련 간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중에 한명인 블런트는 정보기관도, 외교관도 아니라 미술사학자의 길을 선택했는데요. 그는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귀족 출신이 왜 공산주의자가 되었을까요?
란코프: 흥미롭게도 그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여러 나라 공산당 지도자들의 배경을 보면, 그들 중에 진짜 노동자나 농민 출신자가 거의 없습니다. 레닌은 누구였을까요? 제정러시아 고급관리의 아들입니다. 맑스도 엥겔스도 부잣집 아들입니다. 심지어 엥겔스는 몇 개의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였습니다. 그래서 귀족출신 공산주의자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전: 영국 캠브릿지 5인조 가운데 가장 유명한 킴 필비는 나중에 소련으로 도피해 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가 소련에서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킴 필비만 소련으로 도망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캠브릿지 5인조 가운데 3명이 소련으로 도망갔습니다. 필비는 소련 정보기관에서 군사계급을 받고, 비밀정보를 분석하기도 했고, 젊은 공작원들에게 강의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소련 당국으로부터 어느정도 감시를 받고 있었고, 외국사람들과 마음대로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문제없이 잘 살았습니다. 소련은 나중에 그가 죽었을 때는 소련 서기장도 참석하는 아주 큰 장례식을 열어 주었습니다.
전: 그럼 소련으로 도주하지 않은 2명은 어떻게 되었나요?
란코프: 동료들이 도망갔지만, 블런트 미술사학자는 영국에 남아있기로 결정했습니다.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조사를 받았고 미술사학자는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 대가로 체포되지도 않고 수감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의 비밀이 20년 가까이 지켜졌습니다. 영국 왕실과의 가까운 관계도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 70년대 말 그가 소련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노출되어서 귀족 칭호를 박탈당했지만, 그래도 별 문제 없이 늙은 나이까지 살았습니다. 한편으로 재무성에서 기밀을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했던 케른크로스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작가가 되었고, 나중에 남프랑스에서 늙은 나이로 죽었습니다.
전: 교수님, 공산주의에 빠져서 소련으로 도망친 미국인은 없었나요?
란코프: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샤랑 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1940년대 초 소련 정보기관에 의해서 포섭되었습니다. 샤랑은 전자기술을 배우고, 미국 군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비밀기술 자료를 소련으로 많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1950년대 초 자신에 대한 조사가 시작한 조짐이 보이자, 소련 공작원들의 도움을 받고 소련으로 잘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제일 재미있는 것은 그의 소련에서의 생활입니다. 소련에서 그는 연구소 부소장, 나중에 소장이 되고 러시아 컴퓨터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진짜 이름을 쓰지 않고 가짜 러시아식 이름을 썼는데, 그는 노어를 잘 했습니다. 물론 발음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다민족 국가여서 발음이 이상한 사람은 흔했습니다. 샤랑은 사실상 당시에 소련의 컴퓨터공학에서 신화와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0년 즈음에 죽었는데, 죽은 다음에야 그가 원래 미국사람이었고 소련으로 도주해온 인물이라는 사실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공산주의를 믿던 사람들은 능력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 교수님, 그런데 이들 포섭된 외국인 간첩들이 소련으로 도망가 살면서 불만이나 실망을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란코프: 확실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그들이 볼 수 있었던 소련은, 그들이 젊은 시절에 소박하게 꿈꾸었던 공산주의 낙원이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들이 아니기 때문에, 빠른 기간 안에 소련에서 사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위험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좋고, 특히 그들처럼 토대가 이상한 사람들이면 위험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잘 배웠습니다. 또 그들에게는 더 이상 도망칠 나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아마 늙을 때까지 어느 정도 공산주의를 여전히 믿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젊은
시절에 열심히 배운 사상을 완전히 포기하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실망이 많아지고 믿음이 약해져도, 어느정도 남아 있습니다. 특히 사상을 위해 많이 싸우고 위험한 일을 많이 했을 경우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보니까 남한에서 북한으로 돌아간 비전향 장기수도 그렇습니다. 2000년대 초 그들이 돌아가서 본 북한은, 그들이 남한 감옥에서 꿈꾸었던 북한과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들은 위험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평생동안 믿었던 것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비밀리에 반공산주의, 반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소문에 따르면 평양으로 돌아간 어떤 비전향 장기수는 외국에서 방문객들이 올 때마다 그들이 달러를 자신에게 주기 위해 가지고 오기를 많이 바랬다고 합니다. 그는 외국 사람들에게 달러를 받지 못하자 불평을 많이 표시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실을 지금도 확실히 알기 어렵고 앞으로도 알기 어렵습니다.
전: 1920-3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소련 공작원들은 진짜 놀라운 성공을 많이 거두었는데요. 하지만 도이췰란드 -독일에서는 결과가 복잡했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1920년대 소련공산당은 국가예산의 4분의 1이나 독일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서 써 버렸다고 하는데요. 소련은 이만큼 막대한 투자를 했는데, 왜 독일에서 큰 성공이 없었을까요?
란코프: 1920년대 성공이 많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1933년 이후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고 독일은 파쇼독재국가가 되었습니다. 원래 독일에서도 영국이나 미국처럼 소련공작원들과 협력하고 포섭되었던 젊은 지식인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들어와 그들 대부분은 매우 엄격한 감시를 받아서, 아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은 겁을 먹어서, 소련 공작원들과 모든 관계를 단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당시에 로젠버그 부부처럼 사형장으로 간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대부분의 경우 몇 년만 감옥에 있다가 석방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파쇼독일이 되고나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파쇼독일에서 외국을 위해 첩보활동을 하다가 잡히면, 당연히 사형 뿐입니다. 살아날 희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1930년대 말 들어와 독일에서는 소련 공작원이나 정보원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소련시대 영화나 소설을 보면, 파쇼독일에서 활동한 공작원이나 첩보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아마 북조선 청취자들 가운데 이러한 영화나 소설을 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공개된 역사 자료를 보면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기 보다 그냥 소설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