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기자가 본 인권] “동유럽 갔던 북한 전쟁 고아들 독재 희생양”

사진은 테레사 파티카(Teresa Partyka, 1953~54년 촬영 추정)가 소장 중인 '폴란드 프와코비체 학교에서 첫해를 보내는 북한 전쟁고아'. [경기관광공사 제공]
사진은 테레사 파티카(Teresa Partyka, 1953~54년 촬영 추정)가 소장 중인 '폴란드 프와코비체 학교에서 첫해를 보내는 북한 전쟁고아'. [경기관광공사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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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기자가 본 인권> 진행에 정영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1950년 한국전쟁시기 북한의 전쟁고아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남북한 통틀어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전쟁에서 북한에도 부모 잃은 아이들이 많았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궁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이 궁금증을 다큐멘터리(기록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이 잘 풀어주고 있는데요. 영화에 따르면 북한은 5천명에서 1만명에 이르는 전쟁 고아들을 폴란드(뽈스까), 루마니아(로므니아)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 ‘위탁교육’ 명목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북한으로 일시에 송환되었는데,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근 16년간의 자료 수집과 현지 답사를 통해 이 사실을 화면에 담아낸 김덕영 감독은 “만일 그때 유럽에서 선진 교육을 받으며 자유와 진리를 깨달었던 북한 아이들이 강제 송환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북한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북한 정권은 체제강화를 위해 외국에서 공부하던 전쟁고아들을 일시에 귀국시켜 뿔뿔이 갈라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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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감독이 영화 상연 뒤에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 RFA Photo - 정영

<탈북기자가 본 인권>오늘 시간에는 미국 동부에서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들’이 상연된 소식과 김 감독으로부터 영화를 찍게 된 사연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지난 6월 29일 저녁 7시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 애난데일 한인센터. 미국 북한자유연합 수잔 솔티 대표와 김덕영 감독, 북한인권 관계자들과 한인들, 자원봉사자들이 모였습니다. 미주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이곳에서 다큐멘터리(기록영화)“김일성의 아이들”이 상영되었습니다. 북한이 6.25전쟁 시기 고아가 된 아이들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현장 음악> 기차소리, 초췌한 전쟁 고아들의 모습.

평양을 떠나 두만강 하싼 국경을 넘은 기차는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을 가로 질러 폴란드, 체스코슬로벤스코, 루마니아 등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 향합니다. 해당 국가에서 나온 인도주의 관계자들이 북한 고아들을 인계받고, 아이들과 동행한 북한 교사들은 기숙사와 학교로 안내됩니다. 처음 서먹서먹했던 외국학생들과 북한 학생들은 금방 서로 친구가 되었고, 이들은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휴식일에는 모여 놀았다고, 지금은 70~80세가 넘은 외국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북한 고아들이 불렀던 북한 노래 ‘김일성 찬가’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녹취/ 외국인들 음성>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김일성 장군의 노래)

이와 관련해 한 영화 평론가는 “1950년대 그때 벌써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가 본격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폴란드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은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이었습니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이 갓 끝나고 동유럽 국가들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전쟁을 힘겹게 치르고 있는 북한에 손을 내민 것입니다. 이렇게 동유럽으로 간 북한 학생들에게 자유는 차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따금씩 외국 학생들과 어울릴 때면 북한 학생들은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고향에 대한 생각, 가족 친척 생각 등으로 울적해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사랑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사로 파견됐던 북한 남성과 루마니아 교사 출신 여성 미르초유 씨가 국경을 초월한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미르초유 씨는 학생들을 위해 수고하는 조정호씨의 성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잘 생긴 외모에 반해 쉬는 주말에는 조씨와 춤을 추러 가기도 하고, 케익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이들의 열렬한 사랑은 국제 결혼에 부정적이던 북한과 루마니아 정부의 허가를 얻어 결혼으로 이어졌고, 두 사람은 평양으로 이주해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병치료 때문에 루마니아에 입국했던 미르초유 씨는 북한당국이 비자를 내주지 않아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한평생 남편을 기다리며 딸을 데리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후 남편이 탄광으로 이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이어 2004년에는 사망통보까지 받았지만, 자주 번복하는 북한 정부의 말을 잘 믿을 수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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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북한자유연합 수잔솔티 대표가 “김일성의 아이들” 상연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RFA Photo - 정영

그후 북한 고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화는 고아들의 비극적 운명은 ‘학생 전원 귀국’이라는 북한 당국의 명령으로 시작된다고 설명합니다. 북한 당국의 갑작스런 송환 지시에 반대해 두명의 학생들이 탈출하다 적발되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또 어떤 학생은 북한에서 걸어서 동유럽으로 가던 중 늪에 빠져 생을 마감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집니다. 이미 세계관이 형성되는 주요한 시기를 유럽에서 보내면서 자유와 인권을 경험한 북한 학생들이 강제로 통제 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폴란드의 한 마을에는 북한어린이들이 돌아가기 전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비문이 있습니다.

자그마한 돌 비문에 자신들의 이름과 추억의 문자를 남긴 겁니다. 당시 친구들이었던 80대의 외국 노인들은

함께 어울려 공부하며 친했던 북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되뇌입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미국자유연합 대표 수잔솔티 대표는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수잔 솔티 대표 : 저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는데, 영화를 통해 이 고아들이 북한 정권의 주체사상과 편집증의 첫번째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씨 독재자들은 북한 주민들이 외부에 대해 알게 되면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강제송환) 한 것입니다. 동유럽에 살았던 경험과 그곳의 문화를 배운 이 아이들의 경험은 북한 정권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송환될 때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김정은 정권을 약화시키지 않도록 시골 지역에 고립되었던 것입니다.

계속하여 그는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이 외부 세계에 대해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고 북한 주민들을 계속 고립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북한에 정보를 유입하는 것이 매우 절실하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상영이 끝난 다음 김덕영 감독은 영화를 찍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독 : 제가 원래 전쟁과 고아에 관한 관심이 좀 많았어요.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의 많은 전쟁 고아들이 입양을 통해서 미국이라든가 북유럽으로 입양이 됐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이가 40~50이 되면서 자기 뿌리를 찾겠다고 마치 연어가 고향으로 돌아오듯이 다시 돌아와서 엄마 찾겠다고 이렇게 생모를 찾겠다고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안타까웠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전쟁과 고아의 문제를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동유럽으로 집단 이주했다는,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잘 정보를 몰랐죠. 그 얘기를 듣고서 너무 깜짝 놀라서 취재를 하기 시작했던 거죠.

김덕영 감독은 이 영화가 상영되기까지 16년이 걸렸다고 설명합니다.

감독 : 2004년서부터 시작해서2020년에 영화가 완성이 돼서 극장에 개봉이 됐으니까요. 동유럽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이런 여러 나라들 뿐만 아니라 사실은 몽골에도 갔다는 증언이 있어요. 그 당시에 소련이 중심이 된 사회주의 연대 차원에서 이것이 굉장히 광범위하게 진행됐던 일종의 '사회주의 연대 프로젝트'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김 감독은 70년전 자료를 찾기가 어려웠고, 더욱이 공산국가들이어서 자료 정리가 안되어 있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김 덕영 감독은 알려진 것보다 실제 동유럽에 간 북한 전쟁고아 수는 더 많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감독 : 이 아이들이 공식적으로는 한 5천 명 돼요. 하지만 제가 취재하면서 알게 된 게 한 1만 명 정도까지도 올라갑니다. 북한 사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만 명이나 되는 유럽에 앞선 선진적인 기술과 문명을 접수한 아이들은 북한 사회 발전에 반드시 활용이 됐어야 해요. 이 아이들이 곳곳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북한 사회에 들어가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고 자기의 위치 속에서 발전을 이뤄냈다면 아마 북한 사회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와는 굉장히 다른 차원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을 겁니다.

그러면 왜 북한은 전쟁 고아들을 북한으로 데려갔을까? 계속하여 김덕영 감독의 말이 이어집니다.

감독 : 그런데 안타깝게도 잘 아시겠지만 1956년 종파 투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권력 강화가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김일성이 자신의 정치적 강화를 위해서 1만 명이나 되는 유럽의 앞선 선진적인 기술과 문명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유라는 개념을 깨달았던 이 아이들을 제거를 한 거죠.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이건 인권적인 차원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거죠.

<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늘 시간에는 미국 동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이 상연된 소식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워싱턴에서 정영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