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원희
오늘은 재일교포 자녀로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가 40여 년 간 살다가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공안에 자수를 하고 강제 북송 당하게 되는 지바 유미코씨의 두 번째 얘기를 전해 드립니다.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 등 제3국에서 떠돌고 있는 많은 탈북자들은 지금도 목숨을 걸고 남한이나 미국으로 들어갈 탈출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북송되었던 재일 교포 자녀들이 북한을 탈출해 일본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지난 60년대 부모님을 따라 북송선을 탔던 지바씨와 그의 자녀들이 중국에서 북한으로 강제북송 당한 얘기를 들어봅니다.
북한으로 들어간 재일교포 들을 북한에서는 귀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조총련 선전을 듣고 북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지만 대부분 일본의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려운 북한 생활을 꾸려갔습니다. 그러나 귀국자의 자녀인 지바 씨의 아버지는 북한의 한 기업소 고위급 간부를 지냈고 지바 씨 역시 대학의 체육교사로 북한에서는 어려움 없이 잘 살았습니다. 지바 씨는 생활이 몹시 어려웠던 같은 귀국자 자녀에게 외화벌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사업을 하던 이 귀국자가 불법을 저질렀다며 북한 당국은 돈을 빌려준 지바 씨에게 연대 책임을 물어 지방으로 추방령을 내립니다.
지바 씨는 여러 곳을 다니며 자신이 북한에서 얼마나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 했는지 호소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느냐며 추방령이 철회되도록 간청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도 당 안전부에 찾아가서 울면서 제발 몸만 신의주에서 살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해 달라, 10년이든 20년이든 조용히 살 테니 문제 해결 될 때 까지 기다려 달라...그러면 그렇게 하라 하지만 법에서 언제든 나가라면 나가라, 그렇게 하겠다...
지바 씨는 북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추방 이라는 당국의 방침이 철회 될 수 없음을 알고 탈출을 생각하게 됩니다.
두 어린 자식들한테 무릎 꿇고 엄마 죄를 용서해 달라 본의 아닌 죄 인데 용서를 해달라며 두 아이 동의를 얻어 결심을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한 거예요26:03 전혀 생소한 일이라서 지금 많이 나온 사람들처럼 돈 주고라도 탈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그러나 죽어서 혼이라도 북한에 묻히고 싶지 않더라구요.
지바씨는 주변의 도와줄 만한 사람도 없자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밤마다 지도를 펴놓고 공부를 했습니다.
감시가 붙어있죠, 돈이 있다 해도 그 탈출 길이 평 북도는 전혀 없어 그래서 정말 야밤에 지도를 꺼내놓고 연구를 했어요. 그래서 5시간정도 배를 타고 가면 섬이 있는데 국경연선 지대라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도 그 근처에 살았지만 압록강으로는 절대로 안되요 얼음 얼어서 80년대 90년대 튄 사람도 있지만 보트도 왔다 갔다 하지만 불가능해요 내가 처한 환경에서는 더 더욱 불가능해요.
지바씨는 아이들 에게도 왜 북한을 탈출해야 하는지 계속 설득을 시켰다고 말합니다. 이 사회 환경이라든지 북한 독재정권은 이렇다, 엄마가 이 정권에 이렇게 충실했지만 이지경이라는 것, 당장 죽으면 죽었지 누구한테든 말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두 아이한테 일 년이라는 세월을 교양했습니다.
그는 그동안에도 감시를 받아가며 지도 공부를 하면서 단둥 \x{cabe} 의 탈출 길이 좀 쉽다는 것을 알아내어 탈출 준비를 하고 드디어 탈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탈북 할 때 미국 돈 바꾸어서 중국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암풀이라는 주사, 고양이도 밥에 한 방울 떨어뜨리면 직사 하는 암플을 비싸게 구입해서 엄마가 자식들에게 탈북 할 때 총에 맞든 잡히면 그것을 씹어서 즉사 하자고 정말 혼이라도 북에 묻히지 말자고... 우리는 썰물 때 뛰었어요. 중국의 단둥 시 하고 동강 시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시골 부두 쪽에 2000년 12월에 탈북 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아이들도 다 함께....
그는 이렇게 3가족이 중국에 숨어살면서 큰 딸이 중국에 있는 한국인 회사에 취직을 해 안정을 찾아 가고 있는 때 2003년 1월 중국 산둥성 옌타이 항에서 80여명의 탈북자 들이 보트로 탈출 하려다 잡힌 사건이 일어납니다. 지바 씨는 당시 이 80여명이 탄 탈북자들이 탄 배가 떠날 때 아이들과 함께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배를 직접 탈 때 차를 가지고 와서 우리 아이들과 함께 데려간다 이렇게 전화상으로 말은 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있는 아파트라든가 그런데는 속해 있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일이 중국공안에 발각이 되어 모든 탈북자와 이들을 돕던 최영훈씨 그리고 사진작가 석재현씨 등이 다 검거 되었다는 소식을 딸과 지바 씨를 돕던 한국 유학생들이 인터넷 E 메일로 전했습니다.
갑자기 우리가 함께 가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이 잡혔다는 것 최영훈 씨도 잡혔다고 해서 완전 잠수룰 해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나로서는 그때 유학생 이 방학을 했는데 나를 무사히 한국이든 일본으로 배타고 보낸 다음에 자기네방학에 들어가려고 학생들이 교대로 남아 있어 그분들의 도움으로 어느 창고 같은 곳으로 숨었어요.
그는 유학생들이 구해다준 조그만 텔레비전을 통해 뉴스를 보면서 딸과 자신을 도와준 유학생들이 곤경에 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뿐 이었다고 합니다.
중국외무성 성명 발표가 있었어요. 이에 연관된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다시 검거 체포해 법대로 처리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동안 보살펴준 너무나도 고마운 분 들 에게, 마지막 까지 남아 있어준 그 대학생 들 에게 지장이 있을 테고 그래서 나 혼자 잡혀 들어 가면 내 주위에 있던 자식을 비롯해 내입만 막고 마지막 까지 우기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딸과 도와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공안에 자수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딸 한데는 ‘엄마가 너희를 지켜려고 그러니까 마지막 까지 안전하게 있으면서 살아서 만나자’ 하는 유서 형태의 편지를 쓰고 한국 대학생들한테는 전화로 빨리 ‘방학하라 고마 웠다 죽지 않으면 만나겠죠, 하고 택시 타고 공안국에 가서 자수를 했어요.
그는 공안에 조사를 받으면서도 오직 한 가지, 목숨을 건 강제북송에 대한 항의 였다고 말합니다.
북송되어서 북한에서 죽을 수 없었어요. 저는 죽어도 중국 땅 에서라도 묻히고 싶은 심정 이었죠. 그런데 정작 죽으려니까 꽁꽁 묶인 상태라서 마음대로 죽지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동맥 입으로 다 물어뜯고 반지, 젓가락, 비누조각 몽땅 삼킨 상태 였고 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숨만 붙어 있었지 연패 병원의 간호사들도 울면서 북송 시키지 말라고 이렇게 처참한 꼴로 어떻게 보내느냐고 신발 다 벗기도 바지도 입히지 않은 채로 그랬어요.
지바씨는 이런 상태로 결국은 북송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보위부에서는 당한 고문은 상상 할 수도 없었다고 하는데...
연페 사건 때문에 보위부 감옥에서 굉장했어요. 11:25의자에 꽁꽁 묶어 놓고 때리고 사람으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고문을 받으면서 내가 이 국가 사회를 위해서 김정일, 김일성 받들면서 지금까지 충실한 것 밖에 없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보위부에서 몰래 죽이지 말고 공개 총살해 달라고 악을 썼어요.
그는 보위부 감옥 독 감방에서 족쇄로 묶인 상태에서도 끝까지 공개 총살을 요구 했다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지바씨의 재탈북과 일본으로의 입국과정 얘기를 전해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