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원희
‘제3국을 떠도는 탈북자들’, 오늘은 재일교포 자녀로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가 40여 년 간 살다가 중국으로 탈출한 ‘지바 유미코’ 씨의 얘기를 전해드립니다.
중국이나 동남아 지역 등 제3국에서 떠돌고 있는 많은 탈북자들은 지금도 목숨을 걸고 남한이나 미국으로 들어갈 탈출 길을 찾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북송되었던 재일 교포 자녀들이 북한을 탈출해 일본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지난 60년대 북송선을 탔던 재일교포와 그 자녀들 중 지바 유미코 씨가 왜 북한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는지 들어봅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60년에 출생 3살 때 63년도 부모님들이 조총련에 속아서 부모님들이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지바 씨의 북한 생활은 북송선을 탔던 다른 재일교포 즉 귀국자와는 달리 일본의 친척 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식량난 때도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고 말합니다.
제가 인민학교 고등중학교 그때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은 전해 생각해 보지 못 했어요. 당시 엄마 아버지가 열심히 해서 밥을 꼭꼭 챙겨주시고 했으니까 동원 나가고 하면 먹고 살기 힘들거나 배가 고픈 감은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우리는 북한으로 간 다음에 일본의 친척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런 측면에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일본 친척들로 부터는 생활필수품부터 현금까지 지급을 받아 생활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항공편부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생활필수품 즉 옷으로 부터 생활에 필요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오곤 했고 그다음에는 만경봉호라는 배편을 통해서는 대하물 수하물로 나누어서 온 것을 중국 사람들한테 그것을 조금씩 유통 시키는 방법도 있었고 현금으로는 방문단으로 오는 사람들을 통해서 현금 같은 것은 직접 받았어요.
그는 다른 귀국자 집안과는 달리 아버지가 기업소 고위급 간부였고 일본의 친척들로 부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식량난이 시작된 후에도 직접적인 어려움을 겪지 못했지만 주변상황에서 북한이 점점 어려워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일성이 94년도 7월 에 사망했는데 92년도부터 홍수 피해, 우박 피해도 있으면서 농경지가 폐허 되었다는 것을 간부들 이라 그 아줌마들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었고 현실적으로 줄어든 것이 92년도 초부터 라고 저는 생각되어요. 생계유지를 위해 먹고 사는 것이 확실히 달라지기 시작 했어요.
그러나 지바 씨는 체육대학 교사로 있으면서 귀국자로서는 드믈게 신임 받는 집안 배경 으로 너무 순진하게 북한 사회를 받아 들였지만 식량난이 가져온 북한의 체제에 대해 깊이 생각 할 기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너무 북한사회를 위해서 너무 충실한 여자였어요. 10년 어간에는 북한에 북송된 가문에서는 상상조차 못하는 간부로 급상승하는 친척들도 있었으니까 일본에서 오는 옷 은 남 주는 것은 물론이지만 현금을 국가에 지원 한다는 명목으로 바치는 그렇게 해서 너무나도 철없이 교만하게 순진한 마음이었어요.
95년도에 한 달 조금 넘는 동안 굶어 죽은 시채를 치우고 산에 교지 림에 평지를 만드는 일을 하다가 휴유 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을때 섬\x{cc1f}한 생각이 들어 혼자는 뭐라고 말 살 수 없이 눈물만 나고 아 이것이 우리 귀국자들에 대한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던 차에 같은 재일 북송자의 자녀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 벌이를 할 수 있도록 사업 밑천으로 돈을 빌려주면서 자신은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됐다고 합니다.
그 귀국자 집 방문을 하면서 현실적으로 부모님과 고생하는 기가 막힌 현실을 보았어요. 마음이 동해서 돈을 좀... 그 쪽에서는 큰 돈 이었죠. 그것을 빌려주면서 아무 때나 가정도 추세우고 국가에 이바지 하는 큰 사람이 16:38 되어서 본전만 갚아 주면 되겠다는 식으로 좋게 시작이 되어서 그 사람을 외화벌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어요.
하지만 이일로 인해 그가 갑자기 집과 재산을 그대로 남겨두고 시골로 \x{cad2}겨 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지바 씨는 말했습니다.
96년도 평양에 가서 학생들 데리고 가서 하는 행사를 모두 끝내고 11월말 평양에서 내려와 보니 대학에서 학장 선생님과 초급당 비서 선생들이 나와서 갑자기 추방령이 내렸다는 거예요 집도 해지당하고 가구등도 모두 해지 당했다는 거예요 갑자기 9월 달에 그랬다는데 나는 평양에서 2-3달을 집단체조 행사가 있어서 한 두 달 정도 모르고 있다가 정말 마른 하늘에서 벼락 맞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하늘이 새까매...
그가 갑자기 도시에서 아이들과 함께 농촌으로 \x{cad2}겨 가는 것은 다름 아니라 어려운 처지의 같은 귀국자를 도왔다는 그 이유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외화벌이를 하면서 매음권(불법유통) 이라는 법에 걸려 감옥에 갔대요 그러니까 내가 돈을 빌려주어서 자유사상과 자본주의 여독을 물들이게 한 장본인 이래요 내가 그래서 그 연대적 책임을 나는 물론 두 아이까지 모두 농촌으로 문건이 9월 달에 다 가있데요 그리고 내 집은 모두 회수를 해서 그때 당시는 도 보위부장으로 있던 사람이 둘째 딸이 내 집으로 배치를 받아 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바 씨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했지만 북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허사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집도 없죠. 큰 집에 큰 재산에 아무것도 없이 행사 끝나고 여행가방 가지고 우리 여동생 집에 갔어요. 그런데 형제들은 다 알고 자기네들까지도 연대 책임을 있을까. 보아 벌벌 떨면서 언니 어떻게 잡혀가지 않고 곧바로 왔느냐고 너무 억이 막혀 담당 보안서 담당 경찰 구역으로 가서 당장 소장 데려 오라고 하니까 역시 선생 맞구나 자기네도 집행 령을 받아 집행 하려고 보니까 이제처럼 그 선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래서 어제 학장이나 비서도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당장 문제 해결하라고 굉장했어요. 개인 변호사 찾아서 문제 해결도 못하는 세상 이예요.
그러나 이 억울함 아무리 호소를 해도 북한 사회에서는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지바 씨는 북한을 탈출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저는 생계유지 때문에 탈북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 결국은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아 마지막에는 당장 잡아 추방구역으로 보내라고 그렇게 되었데요. 귀국자는 성분이 나쁜 것으로 생각해서 간부들도 좀처럼 접근을 안해요. 그래서 완전히 감시가 붙어 있으니까 도망치는 형태로 있다가 그다음에 아이들한테 찾아가 탈북 해야 되겠다 이렇게 결심 했는데....
하지만 지바 씨는 전혀 뜻밖의 사태로 탈출을 하려니 탈출 길도 알 수가 없고 감시자가 늘 따라 붙어서 도움을 받을 사람도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이들 동의를 얻어 돈 주고라도 지금 많이 나온 사람들처럼 탈출길 을 찾을 수도 없고 전혀 생소한 일이라서 하지만 죽어서 혼이라도 북한에 묻히고 싶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나는 감시가 붙어 있으니 오늘 잡힐 지내일 잡힐지 잡히면 수용소인데 아니면 교수형 총살 감인데.. 압록강으로는 절대로 안 돼요. 얼음 얼어서 80년대 90년대 튄 사람도 있지만 보트도 왔다 갔다 하지만 그것을 불가능해요 내 지금 처한 환경에서는 더 더욱 불가능해요.
지바 유미코 씨는 당시 인민반장이나 보안원에 매일 매일 생활을 보고 할 때라 탈출 결심은 굳혔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