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국을 떠도는 탈북자들: 몽골을 거쳐 남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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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기획 '제3국을 떠도는 탈북자들' 오늘은 어린 시절 중국 친척집으로 양식을 구하러 갔다 떠돌이 신세가 된 후, 몽골을 거쳐 남한으로 입국한 이영수씨의 탈출과정을 들어봅니다.

최근 남한의 탈북 대학생들이 미국 워싱턴 지역을 방문해 그들이 체험했던 북한실상과 목숨을 건 탈출 과정을 증언했습니다. 이중 연세 대학에 재학 중인 이영수 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 식량사정과 중국으로 가기위해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던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3형제가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그 때만 해도 끼니를 굶는 고통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이영수: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바다에서 고기잡이 하시다 사고로 돌아가셔 어머니가 혼자 아들 3형제를 힘들게 키워주셨는데 형하고 남동생하고 엄청 싸우기도 했지만 재미있게 컸습니다. 어머니 속도 많이 썩혀 드렸고... 사실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어린 시절 에는 하루 3끼 배를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다 이 가정에도 94년도부터 식량난으로 인한 고통이 닥쳐와 나무뿌리와 뿔 뿌리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 했습니다.

이영수: 김일성 죽고 나서 부터 우리가족 식량난의 어려움이 닥쳐왔는데 그때 옥수수 가루에다 풀을 넣은 것이 양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라도 있었는데 이렇게 1년, 2년 지나다 보니 점점 그것도 없어졌습니다. 저희는 어머니가 홀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식량배분 하는 양이 적었어요.

3형제는 배급 식량이 형편없이 줄어들자 식량해결을 위해 산으로 들로 나서게 되었다고 영수 씨는 전했습니다.

이영수: 우리형제가 산에 가서 나무뿌리, 칡뿌리를 캐었고 그리고 나무껍질을 벗겼어요. 나무 두꺼운 껍질을 벗기면 안에 부드러운 껍질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겨 한 배낭씩 지고 와서 가마에 넣고 몇 시간 끓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절구에 찧어서 여기에 옥수수가루 서너 숟갈 넣어서 그 것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산에 먹을 수 있는 풀이건 먹지 못하는 풀이건 다 캐어가지고 와서 그것을 삶아 여러 번 울려 먹고 그렇게 끼니를 이었습니다.

매일 이런 양식으로 연명하기도 하고 굶기도 하다 외삼촌과 함께 중국의 친척집을 찾아 쌀을 얻어 오기위해 두만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이영수: 사실 사람인데 사람의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뼈만 남다보니 하루는 삼촌이 저희 집에 오셔서 중국에 가서 쌀 한 베낭만 얻어오자고 해서 삼촌과 중국에 갔습니다. 저희 외가 쪽은 중국에서 60-70년대 건너왔어요. 그래서 외가 친척들은 중국 에서 많이 살아요. 그래서 외가에 가서 살 한 배낭만 얻어오자고 해서 외삼촌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려고 두만강으로 갔습니다.

이영수 씨는 외삼촌과 함께 국경 경비대의 활동이 뜸한 밤 시간을 기다렸다 손을 꼭 잡은 채 강물로 들어섰습니다. 강폭은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당시 비가 온 후라 강 깊이를 가름 할 수 없어 물속에서 삼촌의 손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이영수: 제가 보기에도 강폭은 가까운 거리였는데 물살이 세었어요. 외삼촌은 저의 손을 잡고 뛰어 들었는데 점점 가면서 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갑자기 깊어지는 곳에서 저도 외삼촌도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어요 그런데 그때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 몰랐습니다.

결국 두만강에서 삼촌을 잃은 영수씨는 북한 쪽 두만강을 향해 삼촌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아 그대 암담했던 심정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영수: 온갖 힘을 다해 헤엄을 치고 제가 중국 땅에 도착했을 때 이미 외삼촌은 보이지 않아 크게 외쳤어요. 삼촌 삼촌 어디 있어요? 사실제가 소리를 질렀을 때 북한에서는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예요 저기 북한애가 건너갔을 것이라고... 삼촌 어디계세요 빨리 건너오세요라고 절규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응답이 없었어요. 저는 외삼촌이 익사 하셨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이영수씨는 중국 땅으로 들어섰지만 삼촌을 잃고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눈을 떠보니 북한 에서 목적지로 미리 눈 여겨두었던 마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영수: 북한쪽에서 마주 보았을 때 중국 작은 마을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마을은 온 데 간 데 없어진 것입니다. 물에 많이 떠내려 왔던 것입니다. 1시간 거슬러서 올라가니 북한 땅에서 보았던 작은 마을이 있더라구요. 그 마을에 들어가서 도움을 청 했어요. 북한에서 왔는데 밥 좀 달라고 구걸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 도와주지 않더라구요. 여러 집을 거치던 와중에 좋은 분을 만나 도움을 청하니까 밥을 먹고 목욕을 시켜주고 그렇게 중국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삼촌만 의지한 중국행이라 친척 주소도 가지고 있지 않아 친척집에 연락은 물론 집도 찾을 수가 없어 너무 막막했다고 합니다.

이영수: 제가 길도 모르고 말도 모르고 어린나이이기 때문에 굉장히 두려웠어요. 그러던 참에 외삼촌이 떠나면서 저한테 한두 마디 친척에 대해 언급을 하셨는데 그중에 친척한분이 중국 훈춘 쪽 공안국의 간부였다고 이름을 얘기해 주시고 다른 것은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이름이 기억나 중국 분에게 중국 땅에 아무 연고가 없기 때문에 이름만 알고 있어 이것으로 알고 있느냐 이름을 얘기하니까 이틀 뒤 저를 데리고 시내 나가 전호 번호부에서 찾았어요. 그래서 그 분짐에 전화를 했더니 데리러와 다른 친척집으로 데려다 주었어요. 그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머물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히자 친척들은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다시 거는 위험이 있다며 모두가 조금 더 크면 돌아가라고 말렸습니다.

이영수: 친척들이 네가 북으로 건너가지 않으면 가족들이 너를 찾으러 올 수 있다 그리고 네가 건너가다 만약 물에 빠지면 죽을 수 도 있고 건너가다 잡히면 죽을 수도 있는데 차라리 여기에 있다 조금 큰 다음에 가라고 저를 설득 시켰습니다.

이영수씨는 당시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로 굶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면 조금 이라도 식량을 얻어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친척 어른들의 말을 들으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이영수: 북에서는 어머니하고 형하고 동생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제가 중국에 머물면 가족들이 굶어 죽을 텐데... 가야 되는데 가야 되는데 하면서 저는 계속 고민하다 너무 고통스러운 결정을 했습니다. 중국 땅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워싱턴-이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