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이원희 leew@rfa.org
북한탈출, 체포, 북송, 재탈출에 성공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두 발을 모두 잃은 탈북자 박해리 씨. 그가 최근 미국에서 치료를 마치고 치료를 마치고 남한에서 새 삶을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의족이 아직은 너무 불편해 가까운 곳도 전동휠체어를 이용합니다. 이같이 신체장애로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함께 남한에 입국한 아들을 있어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원희 기자가 재활을 시작한 박해리 (가명) 씨의 얘기 들어봅니다.
박해리: 자식 때문에 나는 나이 먹었으니까 대충 살아도 괜찮지만 우리아들은 앞으로 미래가 있지 않아요.
가명을 쓰고 있는 40대 탈북자 박해리 씨는 미국에서 두 번의 다리 수술을 받고 의족을 맞추어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북한을 탈출, 중국 몽골을 거쳐 남한으로 오는 과정에 두발을 모두 잃은 장애인이 되어 남한 입국 7년 만에 재활의 의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박해리: 우리아들 중국에서 호적을 어디다 올려요 그러나 한국에 가면 그런 것을 다 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를 쓰고 한국으로 오겠다고 하다가 그때 한국으로 오려고 생각도 안 했으면 다리가 이렇게 안 되었죠. 갑자기 이런 봉변을 당하다 보니...
박 씨는 지난 2천년 아들과 함께 탈북 해 2003년 12월 몽골을 통해 한국행을 시도하다 북송 당했습니다.
박해리: 아들이 한번 잡혀 들어가고 제가 한번 그렇게 되고... 중국을 출발해 몽골을 통해 한국으로 오다가 다 몽골에서 그렇게 되었죠. 몽골 국경에서 12월 겨울에요 그때 보니 사과도 땅땅 얼어서 이빨도 도 안 들어가요. 그렇게 추었어요. 제가 동상은 동상인데 감옥에서 바로 치료를 하면 되는데 매 맞고 그러니까 치료를 못 받았어요.
박씨는 1월 온성 군 보위부의 추운 감방에서 보위부원 들이 한국으로 탈출하려 했다며 동상으로 부어오른 발을 쇠꼬챙이로 찌르고 사정없이 때렸다고 말했습니다.
박해리: 그것들이 감옥에서 나더러 다리가 뚝 잘라져야 된다고 했거든요 다리 뚝 잘러야 거기(남한)를 못 간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감옥 안에서 매 맞고... 고문이라는 말은 한국에서나 통하지 북한 사람들은 고문 이라는 말을 안 써요 매 맞았다고 써요 7:55 감옥 안에서 자꾸 매 맞고 고통스럽다 보니 다리가 점점 심해져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었죠.
이렇게 매일 고문을 당하고 족쇄까지 발가락에 채우자 쇠 독으로 발이 더 부어올라 썩기 시작했다며 정말 감옥에서의 일은 떠올리기가 너무 고통스럽다며 말문을 닫습니다.
박해리: 저는 지난 일을 떠올리려고 하면 눈물밖에 나는 것이 없고 이제는 내 몸이 절반 나간 것과 같지 않아요? 그것을 자꾸 상기해 보았자 그저 가슴이 쓰린 것 밖에 없어요.
북한 당국은 박 씨가 감옥에서 발 뿐 만 아니라 온몸 까지 검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집에 가서 치료받고 오라고 석방을 시켰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대강 치료를 하고 다시 지팡이를 짚고 2004년에 중국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두 발을 절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구의 몸으로 그는 중국, 버어마, 라오스, 태국을 거쳐 드디어 2005년에 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박해리 씨는 지난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렸던 북한인권 포럼에 참석해 증언하고 치료를 받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었습니다. 하지만 워싱턴에서 계획되었던 증언을 하지 못해 못내 아쉬워합니다.
박해리: 미국에서 수술 받고 좀 나으면 인권대회에 참여 하려고 했는데 수술 받고 일어서지도 못한 상태니까 병원에 입원하다 보니 워싱턴에 못 갔어요.
그는 계속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재수술을 받고 의족도 하고 치료를 받느라 몇 달을 보냈지만 더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들의 말을 뒤로 하고 남한으로 갔습니다.
박해리: 병원은 한 3달 다녔는데 입원 생활은 거의 한달 20일 그렇게 밖에 못 했어요. 수술 하고 좀 더 있으라고 의족을 좀 더 완전히 하 다음에 하라는 것을 그때 당시 상황이 안 되어.. 선생님들도 좀 더 있다가 완전히 한 다음에 가라고 했는데 상황이 안 돼서...
박해리씨는 미국에서 첫 번 다리 절단 수술을 하고 의족을 했지만 고통이 너무 심해 다시 다리를 절단 하는 수술을 받고 의족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의족을 착용 할 때 마다 무릎의 연한 부분에 피가 나고 덧나다가 다시 아물고 하는 상황을 반복되는 고통을 견디고 있습니다.
박해리: 치료가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무릎에 물집이 잡혀 또 집에서는 의족 착용을 못하고 의족을 벗고 무릎으로 끌고 다니니까 다시 헐고 피가 나와 의족을 착용하지 않으면 아물고 또 의족을 신으면 피가 나오고 하면서 아무는 단계에 있어요.
집에서는 의족을 착용하지 못해 무릎으로 다니기 때문에 무릎이 성할 날이 없습니다. 박해리씨는 그래도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굳은살이 생겨 의족을 착용해도 아프지는 않을 것 이라고 스스로 위로 합니다.
박해리: 의족이 조금 불편한 것도 있지만 아직 금방 수술을 해서 다리가 금방 새살이 나와 단련이 안 되어 그런 것 같아요 단련이 되면 괜찮은데 지금 단련하는 시기 이니까 굳은 살 배기느라고 피도 나오고 고름도 나오고... 아직 힘들어요.
지금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겨우 혼자 설 수는 있지만 아직도 많은 연습과 운동을 해야 걸을 수 있다면 그때 까지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지금은 가까운 곳을 갈 때도 전동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박해리: 왔다 갔다 운동하고 다녀요 아직 중심을 바로 잡지 못 하기 때문에 넘어지거나 그래요 사람들이 손이라도 잡아주면 제가 조금씩 걷고 그렇지 않으면 가까운 곳이라도 가려면 다리가 아파서 전동차 (전동 휠체어 )타고 다녀요.
박 씨는 수술 전에 절단된 발에서 가려움증을 느껴 고통스러웠는데 미국에서 두 번 수술을 한 뒤 이런 고통이 사라졌지만 다른 어려움이 있다고 전합니다.
박해리: 이제는 발위 다리를 잘라 수술하니까 가려움보다 피가 통하지 않아 차가우면서 계속 절여요 그리고 날씨가 추우면 온 몸이 두드러기 돋는 것처럼 막 돋아요.
박해리 씨는 아들이 있기에 이런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다리를 내려다 보는 순간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박해리: 어떤 때는 가만히 앉아 다리를 내려다 볼 때는 막 피 눈물 이 나고 참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고... 내가 남들처럼 나가서 일도 못하고 다니지 못하니까 엄마가 장애인이 되다 보니 자식을 더 해주지 못하는 것이 가슴이 터지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그래도 박 씨는 아들 얘기를 꺼내자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아들을 위해 두 다리를 잘리면서 까지 남쪽으로 왔지만 엄마의 자식에 대한 애틋함과 흐뭇함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박해리: 이번 8월초에 졸업 시험 쳤어요. 그런데 급하게 공부 얼마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다보니 시험에 떨어 졌어요. 그래 공부 또 해야 됩니다. 이제 시험에 붙으면 대학갈 자격이 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불합격 되어 대학 시험 못 치죠 희망은 있는데 제가 보탬이 못 되니까 안타까울 뿐입니다.
박해리 씨는 집에만 있으면 탈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것 같아 힘들고 괴롭지만 여러 가지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합니다. 그리고 아들이 나날이 성장 하는 모습을 보며 보람과 희망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