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대] 사법고시 준비하는 탈북 대학생 한석 씨
서울-이현주 leehj@rfa.org
2011.03.09
2011.03.09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쪽 젊은이들과 남쪽에 정착한 탈북 청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드리는 <젊은 그대>, 이 시간 진행에 이현줍니다.
(시그널 OUT + 입학식 현장 Sound IN)
서울의 한 초등학교 입학식 풍경입니다. 어린 학생들은 학교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스스럼없이 장난치고 조잘조잘 떠들고, 입학식 시작을 위해 선생님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랴 무척 애를 먹습니다.
4월 새 학기가 시작하는 북쪽과 달리 남쪽은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공휴일인 3월 1일, 삼일절을 하루 쉬고 3월 2일, 대부분 학교에서 입학식이 열리고 나면 3월은 설렘과 긴장 속에 후다닥 지나갑니다. 낯선 선생님과 친구들 속에서 꽃샘추위가 겨울보다 더 매서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 <젊은 그대> 시간에는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년, 4학년 1학기를 시작하는 탈북 대학생 한석 씨를 만나봅니다. 한석 씨는 고려대학교 법대에서 공부하면서 2년째 법조인 즉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는 자격을 검정하는 국가시험, 사법 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 한석 씨 안녕하세요. 우선,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한석: 안녕하세요. 이름은 한석, 고향은 함경북도입니다. 한국에는 2001년 초반에 와서 지금은 고려대학교 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진행자 : 4학년이면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가장 마음이 급한 시기인데 어떻습니까? 한석 : 그렇죠. 아무래도 대학 생활도 이제 다 끝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사실 초조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진행자 : 한석 씨는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남쪽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로스쿨, 법학전문대학원을 가거나 사법고시라는 시험을 통과해야합니다. 아주 어려운 시험으로 정평이 나있는 사법고시, 일상을 포기하고 몇 년씩 준비하는 시험인데요...
한석 : 저도 2년째 공부하고 있고요 며칠 전에도 시험을 봤습니다.
진행자 : 잘 보셨습니까?
한석: (웃음) 말씀하신 대로 쉬운 시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잘 못 봤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제 능력을 확인할 때까지 해볼 생각입니다.
진행자 : 한석 씨는 남쪽에 몇 살 때 오셨어요?
한석 : 열네 살 때 나왔습니다.
진행자 : 그렇다면 온전히 본인의 의지로 나왔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탈북 청년들 중 특히 어렸을 때 나온 친구들은 그런 문제로 고민하기도 하더라고요.
한석 : 반은 제 의지였습니다. 제가 탈북 했을 때가 98년도였는데 식량난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로인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당연히 제가 북한을 탈출하겠다는 다짐을 갖지는 않았지만 제 아버지가 가자고 했을 때 선뜻 거기에 손을 맡겼고 반은 제 의지였습니다.
진행자 : 14살이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사회 전반의 모든 것을 알기는 힘든 나이기도 해요. 고향에서의 일은 기억이 잘 나나요?
한석 : 인민학교 과정은 다 졸업하고 나왔어요. 어린 시절은 다 거기서 보낸 셈입니다. 이상하지만 한국에 온 지 오래됐어도 어릴 때 일이 모두 생각이 납니다. 어릴 때 어떻게 뛰어놀았고 학교 다닐 때 어떻게 공부했고... 잊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진행자 : 그렇군요. 한석 씨가 기억하는 고향은 그럼 어떤 모습이에요?
한석 :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순수하고요. 즐겁고 좋은 추억도 많아요.
진행자 : 어려웠던 기억보다는 그런 기억이 많나보네요.
한석: 왜요? 그렇지 않죠. 제가 북한을 나올 때가 북쪽의 식량난이 가장 심했을 때거든요. 그렇지만 고향은 먹을 것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아픈 기억으로 고향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진행자 : 고향에 대해 얘기할 때 탈북 청년들은 한석 씨와 비슷한 얘기를 참 많이 해요. 동시에 그래서 답답하다는 말도 하거든요? 그런 고향이 좀 더 잘 살 수 있는 길이 명백하게 보이는데도 고향은 전혀 바뀌지 않으니까요.
한석 : 그 속에 있을 때는 몰랐죠. 그렇지만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접하면서 객관적으로 제가 살던 곳을 들여다보니 정말 힘들고 답답하고 정말 세상에 저런 곳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듭니다.
진행자 : 사실은 그래서 탈북 청년들이 자신의 직업과 미래를 정하는 것. 고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석 씨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갖고 이런 꿈을 가졌나요?
한석 : 제가 법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오래됐어요. 10대 중반에 그런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그것이 말씀하셨듯이 북한이라는 사회를 겪고 나왔고 제3국을 거쳐 와서 한국 사회에 살면서 돈보다 사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전공을 정할 때도 사회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사회의 뿌리이자 사람의 등뼈와 같은 존재인 법을 공부하면 사회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법을 다루는 곳에서 일할 수 있으면 나중에 북한 사회에 들어가서 또 그 전에 한국 사회의 수많은 탈북자들을 위해 일하고 싶고 또 궁극적으로 북한이 열리면 그곳에 들어가서 법률을 정비하는데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진행자 : 사실 지금 한석 씨가 말하기도 했지만 탈북자들 법을 몰라서 남쪽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어요?
한석: 예, 아무래도 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의 사회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법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행자 : 한석 씨가 어릴 때 와서 북쪽의 법과 남쪽의 법을 비교하기는 힘들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남한에서 법을 공부한 입장에서 법이란 이런 것이다 설명을 좀 해주시죠. 너무 어려운 질문인가요?
한석 : (웃음) 아닙니다. 사실 저도 어릴 때 나오긴 했지만 제 삼촌이 동네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구타당했음에도 누구에게 마땅히 하소연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걸 보면서 저도 참 많이 울었는데요, 그런데 이런 일은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폭행이라는 것은 엄연한 범죄이고 이 사회는 이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법적인 제도가 갖춰져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이것을 법치주의 국가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이라는 사회는 법에 따라 정해지고 굴러가고 법에 따라 적법성을 바탕으로 추진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과는 상당히 다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 북쪽 사회의 법. 보통 정권의 집행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평가받던데요, 법이 힘이 없는 약자가 아닌 정권을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는 평가인데요.
한석 : 네, 조선노동당의 하나의 수단인 것이죠.
진행자 : 그렇다면 앞으로 북한 사회에 생기는 법은 인민을 위한 법이어야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셔야 하겠어요.
한석 : 네, 맞습니다.
진행자 : 가벼운 얘기도 좀 해볼까요? 학교생활은 좀 어때요?
한석 : 저 말고 (법학과에) 탈북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전체 정원 200명 중의 2명입니다. 초반에는 학교생활이 힘들었는데 더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를 남한에서 나와서 적응이 어렵진 않았습니다.
진행자 : 사실 남쪽에서 고등학교 정규 과정을 거친 탈북청년들이 별로 없어요. 대학 입시를 위해 매진하는 고등학교 3년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얘긴데, 어때요? 고등학교 다니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한석 : 그렇죠. 고등학교 훨씬 힘들었죠. 정규 교육과정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데 그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고등학교를 들어갔으니까... 그리고 한국의 고등학교는 정말 무자비합니다.(웃음) 입시라는 목표를 앞에 두고 무자비하거든요, 그 외의 것은 배려가 잘 안 되죠. 그 경쟁 속에서 적응하고 시험 성적도 나와야 하니 쉽지 않았죠. 평소에는 10시 반까지 학교에서 공부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11시까지 공부하고 도서실에 가서 또 새벽까지 공부하고 했습니다.
진행자 : 지금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어요?
한석 : 사실은 그때보다 많이 해이해졌죠. 그 때는 뭔가 주어진 틀 속에서 적응하고 그 속에서 경쟁관계가 있었는데 대학은 저에게 주어진 자율이 크다보니 제가 알아서 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아서... 솔직히 고등학교에 비해서 공부 많이 안 합니다.
진행자 : 그래서 대학에 가면 방황하는 친구들도 많은데요.
한석 : 사실입니다. 저도 개인적인 반항은 아니고 4학년 올라오면서 제가 어떤 모습으로 앞으로 직업을 가져야 하고 제 인생관을 가져야 하고 하는 문제 때문에 한 1년 정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 1년의 방황, 결론은 내셨어요?
한석 : 아뇨. 아직 못 내렸습니다. 참 어렵네요. 그렇지만 항상 결론은 같더라고요. 제가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나중에 잘 했다고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행자 : 지금 사법 고시 준비하고 있는데 나중에 합격해서 한 번 더 만났으면 좋겠네요.
한석 : 저도 꼭 그러고 싶습니다.
진행자 : 우리 방송은 북쪽의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북한의 세대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한석 : 저희가 한국을 택한 이유가 같은 민족이고 앞으로 저희가 살 곳이기 때문에 택했으니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결점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 석 씨가 같은 처지에 있는 탈북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였네요. 맞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고향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고 그리고 그 사회에 안에 사는 젊은이들 있도록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한석 씨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한석 : 감사합니다.
진행자 : 오늘 <젊은 그대> 탈북 대학생, 한석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시그널 OUT + 입학식 현장 Sound IN)
서울의 한 초등학교 입학식 풍경입니다. 어린 학생들은 학교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스스럼없이 장난치고 조잘조잘 떠들고, 입학식 시작을 위해 선생님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랴 무척 애를 먹습니다.
4월 새 학기가 시작하는 북쪽과 달리 남쪽은 3월에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공휴일인 3월 1일, 삼일절을 하루 쉬고 3월 2일, 대부분 학교에서 입학식이 열리고 나면 3월은 설렘과 긴장 속에 후다닥 지나갑니다. 낯선 선생님과 친구들 속에서 꽃샘추위가 겨울보다 더 매서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늘 <젊은 그대> 시간에는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년, 4학년 1학기를 시작하는 탈북 대학생 한석 씨를 만나봅니다. 한석 씨는 고려대학교 법대에서 공부하면서 2년째 법조인 즉 판사, 검사, 변호사가 되는 자격을 검정하는 국가시험, 사법 고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 한석 씨 안녕하세요. 우선,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한석: 안녕하세요. 이름은 한석, 고향은 함경북도입니다. 한국에는 2001년 초반에 와서 지금은 고려대학교 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진행자 : 4학년이면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가장 마음이 급한 시기인데 어떻습니까? 한석 : 그렇죠. 아무래도 대학 생활도 이제 다 끝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사실 초조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합니다.
진행자 : 한석 씨는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남쪽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이 되기 위해서는 로스쿨, 법학전문대학원을 가거나 사법고시라는 시험을 통과해야합니다. 아주 어려운 시험으로 정평이 나있는 사법고시, 일상을 포기하고 몇 년씩 준비하는 시험인데요...
한석 : 저도 2년째 공부하고 있고요 며칠 전에도 시험을 봤습니다.
진행자 : 잘 보셨습니까?
한석: (웃음) 말씀하신 대로 쉬운 시험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잘 못 봤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제 능력을 확인할 때까지 해볼 생각입니다.
진행자 : 한석 씨는 남쪽에 몇 살 때 오셨어요?
한석 : 열네 살 때 나왔습니다.
진행자 : 그렇다면 온전히 본인의 의지로 나왔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탈북 청년들 중 특히 어렸을 때 나온 친구들은 그런 문제로 고민하기도 하더라고요.
한석 : 반은 제 의지였습니다. 제가 탈북 했을 때가 98년도였는데 식량난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로인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당연히 제가 북한을 탈출하겠다는 다짐을 갖지는 않았지만 제 아버지가 가자고 했을 때 선뜻 거기에 손을 맡겼고 반은 제 의지였습니다.
진행자 : 14살이면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사회 전반의 모든 것을 알기는 힘든 나이기도 해요. 고향에서의 일은 기억이 잘 나나요?
한석 : 인민학교 과정은 다 졸업하고 나왔어요. 어린 시절은 다 거기서 보낸 셈입니다. 이상하지만 한국에 온 지 오래됐어도 어릴 때 일이 모두 생각이 납니다. 어릴 때 어떻게 뛰어놀았고 학교 다닐 때 어떻게 공부했고... 잊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진행자 : 그렇군요. 한석 씨가 기억하는 고향은 그럼 어떤 모습이에요?
한석 :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순수하고요. 즐겁고 좋은 추억도 많아요.
진행자 : 어려웠던 기억보다는 그런 기억이 많나보네요.
한석: 왜요? 그렇지 않죠. 제가 북한을 나올 때가 북쪽의 식량난이 가장 심했을 때거든요. 그렇지만 고향은 먹을 것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아픈 기억으로 고향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진행자 : 고향에 대해 얘기할 때 탈북 청년들은 한석 씨와 비슷한 얘기를 참 많이 해요. 동시에 그래서 답답하다는 말도 하거든요? 그런 고향이 좀 더 잘 살 수 있는 길이 명백하게 보이는데도 고향은 전혀 바뀌지 않으니까요.
한석 : 그 속에 있을 때는 몰랐죠. 그렇지만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정보를 들을 접하면서 객관적으로 제가 살던 곳을 들여다보니 정말 힘들고 답답하고 정말 세상에 저런 곳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듭니다.
진행자 : 사실은 그래서 탈북 청년들이 자신의 직업과 미래를 정하는 것. 고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석 씨는 법조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갖고 이런 꿈을 가졌나요?
한석 : 제가 법학을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오래됐어요. 10대 중반에 그런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그것이 말씀하셨듯이 북한이라는 사회를 겪고 나왔고 제3국을 거쳐 와서 한국 사회에 살면서 돈보다 사회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학의 전공을 정할 때도 사회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사회의 뿌리이자 사람의 등뼈와 같은 존재인 법을 공부하면 사회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런 법을 다루는 곳에서 일할 수 있으면 나중에 북한 사회에 들어가서 또 그 전에 한국 사회의 수많은 탈북자들을 위해 일하고 싶고 또 궁극적으로 북한이 열리면 그곳에 들어가서 법률을 정비하는데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진행자 : 사실 지금 한석 씨가 말하기도 했지만 탈북자들 법을 몰라서 남쪽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어요?
한석: 예, 아무래도 법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의 사회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법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행자 : 한석 씨가 어릴 때 와서 북쪽의 법과 남쪽의 법을 비교하기는 힘들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남한에서 법을 공부한 입장에서 법이란 이런 것이다 설명을 좀 해주시죠. 너무 어려운 질문인가요?
한석 : (웃음) 아닙니다. 사실 저도 어릴 때 나오긴 했지만 제 삼촌이 동네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구타당했음에도 누구에게 마땅히 하소연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걸 보면서 저도 참 많이 울었는데요, 그런데 이런 일은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폭행이라는 것은 엄연한 범죄이고 이 사회는 이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법적인 제도가 갖춰져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이것을 법치주의 국가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이라는 사회는 법에 따라 정해지고 굴러가고 법에 따라 적법성을 바탕으로 추진되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과는 상당히 다른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 북쪽 사회의 법. 보통 정권의 집행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평가받던데요, 법이 힘이 없는 약자가 아닌 정권을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는 평가인데요.
한석 : 네, 조선노동당의 하나의 수단인 것이죠.
진행자 : 그렇다면 앞으로 북한 사회에 생기는 법은 인민을 위한 법이어야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셔야 하겠어요.
한석 : 네, 맞습니다.
진행자 : 가벼운 얘기도 좀 해볼까요? 학교생활은 좀 어때요?
한석 : 저 말고 (법학과에) 탈북자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전체 정원 200명 중의 2명입니다. 초반에는 학교생활이 힘들었는데 더 같은 경우는 고등학교를 남한에서 나와서 적응이 어렵진 않았습니다.
진행자 : 사실 남쪽에서 고등학교 정규 과정을 거친 탈북청년들이 별로 없어요. 대학 입시를 위해 매진하는 고등학교 3년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얘긴데, 어때요? 고등학교 다니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한석 : 그렇죠. 고등학교 훨씬 힘들었죠. 정규 교육과정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데 그 과정을 모두 건너뛰고 고등학교를 들어갔으니까... 그리고 한국의 고등학교는 정말 무자비합니다.(웃음) 입시라는 목표를 앞에 두고 무자비하거든요, 그 외의 것은 배려가 잘 안 되죠. 그 경쟁 속에서 적응하고 시험 성적도 나와야 하니 쉽지 않았죠. 평소에는 10시 반까지 학교에서 공부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11시까지 공부하고 도서실에 가서 또 새벽까지 공부하고 했습니다.
진행자 : 지금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어요?
한석 : 사실은 그때보다 많이 해이해졌죠. 그 때는 뭔가 주어진 틀 속에서 적응하고 그 속에서 경쟁관계가 있었는데 대학은 저에게 주어진 자율이 크다보니 제가 알아서 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아서... 솔직히 고등학교에 비해서 공부 많이 안 합니다.
진행자 : 그래서 대학에 가면 방황하는 친구들도 많은데요.
한석 : 사실입니다. 저도 개인적인 반항은 아니고 4학년 올라오면서 제가 어떤 모습으로 앞으로 직업을 가져야 하고 제 인생관을 가져야 하고 하는 문제 때문에 한 1년 정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진행자 : 1년의 방황, 결론은 내셨어요?
한석 : 아뇨. 아직 못 내렸습니다. 참 어렵네요. 그렇지만 항상 결론은 같더라고요. 제가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나중에 잘 했다고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행자 : 지금 사법 고시 준비하고 있는데 나중에 합격해서 한 번 더 만났으면 좋겠네요.
한석 : 저도 꼭 그러고 싶습니다.
진행자 : 우리 방송은 북쪽의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같은 북한의 세대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한석 : 저희가 한국을 택한 이유가 같은 민족이고 앞으로 저희가 살 곳이기 때문에 택했으니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이 사회에서 결점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행자 : 석 씨가 같은 처지에 있는 탈북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였네요. 맞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이 고향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고 그리고 그 사회에 안에 사는 젊은이들 있도록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한석 씨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한석 : 감사합니다.
진행자 : 오늘 <젊은 그대> 탈북 대학생, 한석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