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입양인 출신 한인, 스티픈 모리슨씨, "북한에 고아원 세우고 싶어"
2007.05.16
워싱턴-장명화
지난 11일은 '입양의 날'이었습니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남한의 한 가정 (1)에 한명의 아동을 (1) 입양하자는 의미에서 11일로 정한 것입니다. '입양의 날'은 올해로 두 번째입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입양의 역사는 이보다 더 깁니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58년 이후 2006년까지 해외입양 한국인은 23만 명 가까이 됩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올해 '입양의 날'을 맞아 한국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한 입양인, 스티픈 모리슨 (Stephen Morrison)씨를 모셨습니다. 모리슨씨의 한국명은 최석춘입니다.

모리슨씨는 언제 미국에 입양됐습니까?
모리슨: 1975년도에 제가 홀트 복지타운을 떠나서 14살 되던 해에 입양됐습니다. 그래서 미국 중부지역의 유타 주에 있는 솔트레이크 시티에 계시는 아주 사랑이 많고, 정이 많으신 미국 부모님한테 입양됐습니다.
고향은 어디십니까?
모리슨: 제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요, 제 고향이 강원도 묵호입니다. 제가 거기서 동생하고 같이 살았어요. 묵호항 언덕에 조그만 움막이 하나 있었는데요, 제 동생하고 거리를 다니면서 동전을 주워서 끼니를 채우고, 밤에는 움막에 가서 잤었죠. 매일 헤매면서 사람들이 떨어뜨린 동전을 주워서 사먹고, 또 어떤 이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과자를 주거나 빵을 주거나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생활을 하는 중에, 굴다리 밑에 삶은 게를 파시는 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요, 그 분이 제 동생을 데려다 키우시겠다고 해서 데리고 갔어요. 저는 그때부터 혼자되었죠. 어느 날 혼자서 다리 밑에서 자고 있는데, 어느 신사분이 저를 어느 고아원에 데려다주셨어요. 제가 거기서 6개월간 있다가 녹번동에 있는 홀트고아원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때가 1962년도, 제가 6살이었어요.
네. 모리슨씨가 입양된 가정에는 아이가 없었나보죠?
모리슨: 우리 (미국) 부모님께서는 슬하에 1남 2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혈아 한 아이를 한국에서 데리고 왔었드랬습니다. 그 아이가 네 번째가 되고, 제가 다섯 번째 아이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정이 결코 아이가 없어서 입양한 게 아닙니다. 오직 제가 가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를 입양한 겁니다.
네. 14살이면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닌데, 적응하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모리슨: 제가 미국으로 와서 새로운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던 기억을 되돌이켜보면, 가족 간의 관계가 매우 중요했고, 사랑이 많았고, 또 그 집의 형제, 자매들이 너무나 제게 잘해주었어요. 그래서 적응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었어요. 제가 미국에 왔을 때는 14살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제가 가지고 있던 버릇이나 사고방식, 뭐 이런 것들이 이미 굳어진 상태였어요.
그런데도 (미국)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뜯어고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도 계속 사랑을 주시고, 적당한 때에 철이 들게끔 도와주시고 기다려주셨어요. 정말 이 세상 살아가면서 그렇게 많은 사랑을 어느 한 분으로부터 받은 적이 없었죠. 그런 제게 아버지, 어머니께서 그런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한때 제게 "스티브야, 우리는 네가 부모가 없기 때문에, 너를 도와주려고 입양을 했는데, 이렇게 긴 세월을 살다보니까, 우리가 너로부터 받은 축복이 훨씬 더 많다" 이렇게 고백하시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그런 고백을 하실 때 제 마음이 얼마나 찡했는지 모릅니다.
미국 대학 등록금이 비싸서 요즘 난린데, 대학과정은 마쳤나요?
모리슨: 제가 퍼듀대학교 공대를 나왔어요. (공부잘 하셨나봐요?) (아니요, 그냥 뭐...)그냥 과학이나 수학을 좋아했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제가 공부를 못했어요. 낙제생이었죠.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에) 갔는데, 이상하게도, 미국에서는 공부를 더 하고 싶더라고요. 뭔가 꿈이 보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하기 싫었던 공부도 하게 되고, 또 못했던 공부도 잘하게 되었죠. 그래서 퍼듀대학교의 우주항공과를 들어가게 되었죠. 제 꿈은 닐 암스트롱과 같이 달나라에 가는 것이었어요.
왜냐면, 암스트롱이 우리 퍼듀대학교 선배님이시거든요. 그래서 나도 우주인이 돼서 한번 우주에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었는데요, 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해요. 하지만, 우주인이 되려면 신체상태가 완벽해야하거든요. 그래도 계속 과학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공대를 졸업하고 남가주의 USC대학에 석사까지 마쳤어요 (아, 진짜 공부 잘 하셨나봐요). USC를 다니면서, 제가 휴즈 우주항공사에서 근무하면서 인공위성에 관한 연구도 했습니다. 현재는 Aerospace Corporation이라는 곳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차세대 GPS-3 인공위성에 대해서 연구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게다가 이번에는 모국정부로부터 큰 상까지 받으셨잖습니까? 보통 성공한 해외한인들이 그런 상을 타던데요?
모리슨: 제가 국민훈장을 받게 된 것은 제가 미주사회에서 성공해서 그런 것이 전혀 아닙니다. 우주과학자로 유명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제가 1999년에 한국입양홍보회를 설립했습니다. 얼마 후 한국입양홍보회를 한국에도 설립하고, 여기에 계신 분들에게 공개입양의 중요성을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 사람들이 왜 공개입양을 안하고, 비밀입양을 하느냐? 이 비밀입양에 대해서 '부끄럽다, 창피하다'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비밀입양을 합니다. 한국의 입양문화가 보편화돼있지 않고, 선입견이 많아서 사람들이 해외입양 역사 50년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입양문화는 하나도 발전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몇 가정을 모아서 "우리 이렇게 하지 말자. 입양은 기쁨이다.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다. 입양의 아름다움을 알리자" 언론을 통해서 알리던지, 어떻게든지 더 이상 입양은 숨길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야지, 고아원 시설에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가정을 갖게 되는 기회가 생긴다고 역설했죠. 이런 운동이 1999년도에 시작됐습니다. 당시는 입양문화가 눈을 뜨지 않아서, 비밀 입양한 가족들이 99.5%였어요. 그런데 8년이 지난 현재, 공개입양가족들이 25%나 늘어났습니다. 한국의 입양문화가 많이 긍정적으로 변화되게 되었죠. 한국정부가 그러다보니까, 이런 이유로 제게 국민훈장을 수여하게 됐습니다.
'고아'들 말씀을 하시니까, 불현듯 생각났는데요, 고아는 남한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북한에도 소위 꽃제비, 즉 배고픔과 질병으로 부모를 잃거나, 혹은 부모가 있어도 보호받지 못하고 버려져 장마당과 역전을 거지처럼 헤매는 아이들이 넘쳐난다고 합니다. 혹시 한국입양홍보회에서 이들을 위한 도움도 펼 계획이 있습니까?
모리슨: 네. 제 소망이 있다면, 언젠가 북한으로 들어가서, 물론 북한정권하고도 손잡고 일할 필요는 있겠지만요, 가정이 필요한 그런 아이들을 위해서 고아원을 설립하고 싶어요. 그 고아원에 이 아이들을, 갓난아기부터 성장할 때까지 키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입양을 보낼 수 있는 가정을 찾아주는 일을 위해 잠시 머물게 하는 그런 고아원을 만들고 싶어요. 저는 이북에 대한 부담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그런 고아였는데, 길이 열리고 방법이 생기면, 꼭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이 북한고아들의 입양을 위해 미국이나 다른 해외국가에 도움을 청할 생각인지? 아니면 남한에서 책임을 져야하는지...
모리슨: 저는요, 지금도 되도록 한국아이들은 한국가정에 우선적으로 입양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물론 제 자신은 한국아이로서 미국가정에 입양되었고, 또 미국가정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죠.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영원히 해외국가들에 입양을 기댈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되도록, 한국 내에서 한국고아들을 다 입양해서 키울 수 있는 것으로 초점을 먼저 맞추어야 되겠고, 그래도 다른 길이 없으면 해외로 입양 보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북에 있는 어린아이들도 정말 남한에서나, 또는 미주한인사회에서 입양해서 키우고 싶다는 일은 정말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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