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시각장애 딛고 백악관 국가장애인정책 차관보에 오른 강영우 박사
2007.07.25
워싱턴-박정우 parkj@rfa.org
시각장애를 딛고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뒤 한인으로서는 미국 정부내 최고위직인 백악관 국가장애인정책 차관보에 오른 강영우 박사. 그러니까 미국 대통령의 집무실인 백악관에서 대통령 자문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현실 속에서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밝은 미래를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 산증인입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강영우 박사를 만나봅니다.
시력은 몇 살 때 잃으셨나요?
[강영우 박사] 네 시력을 처음 잃기 시작한 것은 15살 때 축구공에 눈을 맞아서 망막이 떨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후 몇 년에 걸쳐서 완전히 맹인이 됐죠. 제가 15살때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해서 병원에서 2년 치료받고 2년뒤 기도하면서 보내고 1년동안 재활센터에서 점자 한글 타자기 배우고 하면서 5년 늦어져 맹 학교 중학교 1년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맹인학교 졸업뒤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시고 미국으로 유학을 오신거죠?
[강영우 박사] 친구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떨어지니까 열등감 느끼고 하니까, 비교 경쟁이 아니라 내게 남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그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장기적인 목적을 향해서 앞으로만 달린 거죠 옆으로 딴 사람들하고 비교 안 하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14년 뒤에 제가 한국 시각장애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한국에서 학위를 받으셨군요.
[강영우 박사] 네 1976년에. 그랬더니 저보다 5년 앞서갔던 친구들도 다 따라먹었거든요.
[기자] 네 앞지르셨군요.
[강영우 박사] 그렇죠. 그러니까 거기서 저의 성공 비결 하나가 상대적인 평가의 관점에서 절대평가의 방법으로 인생을 보고 살아라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살자.
[강영우 박사] 남과 비교하지 않고 분명한 인생의 비젼과 목표를 갖고 살아라. 그거죠.
그러면 학위를 받은 다음 미국으로 유학을 온 거군요. 눈이 멀쩡한 일반인들도 쉽지 않은 유학인데, 많이 힘들지 않으셨나요?
[강영우 박사] 저는 유학보다는 오히려 한국에서 맹학교에서 연세대학교로 가는 것이 제일 힘들었고 그다음에 연세대에서 공부하는 것이 유학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열악한 환경, 특별히 맹학교에서 연세대를 가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 참고서가 점자로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입시를 준비해야 했고 또 사회의 편견을 극복해야 했죠. 그 다음에 연세대에 가서는 점자로 된 교재를 구해야 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유학을 와서는 사회 편견 문제도 없고 교재 문제도 없어서 오히려 유학때가 쉬웠죠. 3년 8개월 만에 석사학위 2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님께서도 일생을 고난속에서 역경을 해치면서 오늘에 이른 입지전적인 삶을 사셨는데요 아시다시피 우리 북한 동포들도 굉장히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강영우 박사] 네, 지금 북한 동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제가 겪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금 누구보다도 북한 동포들이나 탈북자들 사정을 잘 알아요. 그래서 제가 지금 한국에서도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탈북자들에게는 재정교육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저는 현실을 상대적으로 보면 절망밖에 없죠. 현재 상황이 언제 변할지 모르지만 불가능에 도전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분명한 비젼과 꿈을 가지고 노력을 하면 현재의 고난이 축복의 기회로 바뀐다는 것을 저는 몸소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 동포 여러분들 또 탈북자 여러분들 무엇보다 희망을 잃지 마시고 현재를 보시기 보다는 밝은 미래, 자유를 누릴수 있는 미래를 보면서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탈북자 문제를 제기하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강영우 박사] 아직까지는 그런 생각을 안했는데 지금 이 방송에 출연하다 보니까, 이것도 내가 해야 할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마음으로 북한 동포들이나 탈북자들을 위해서 마음은 있었지만 직접 관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까 인제는 마지막 자유 또 인권 이런게 북한 동포들이나 탈북자들을 위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일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럼 앞으로 우리 북한 동포들과 탈북자들을 위한 왕성한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강영우 박사] 네, 감사합니다. 제가 기회가 있으면 백악관이나 유엔에서도 이 문제를 대변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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