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백영중 패코스틸 회장, 황장엽 아들과의 아쉬운 인연


2007.05.09

미국에는 현재 200만명이 훌쩍 넘는 한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학력과 출신을 지닌 한인들이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한국을 자랑스럽게 빛내고 있습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미국 경량철골 시장의 60%를 장악해 철골시장의 거인으로 우뚝 선 ‘패코스틸’의 백영중 회장을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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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패코스틸 (PACO Steel)’사의 백영중 회장 - PHOTO courtesy of 백영중

백 회장은 1930년에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나 6.25전쟁 때 홀로 월남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인디애나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후, 기술공학자로 5개의 미국연방 특허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지난 1999년에는 미국의 종합회계법인인 ‘언스트 & 영’사가 주관하고, 미국의 CNN 등이 후원하는 ‘올해의 기업인’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패코스틸 (PACO Steel)’이란 회사 이름은 백 회장의 성인 ‘Paik’의 앞 두 글자와 회사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company의 앞 두 글자를 따서 '패코'라고 했다고 회사 안내서에서 읽었습니다. '스틸'은 '철강'이구요. 이 '패코스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청취자를 위해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백영중: 패코철강회사는 제가 지난 1974년에 창립해서 지금 30여년이 됐습니다. 패코철강은 아이빔을 만들고, 아이빔을 미국전국에 유통하는 회사입니다. 30년이 넘으면서 열심히 일한 결과, 지금 전국 유통망을 갖고 있고, 공장은 알칸소에 차려놓고 연간 15만 톤을 생산하고, 또 다른 데서도 생산해서 유통하고 있습니다.

아이빔이 뭔가요?

백영중: 아이빔이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H빔이라고 합니다. H자 같이 생겼으니까요. 높여놓으면 H자가 되고, 곧장 놓으면 I자 같이 돼서 I-빔이라고 합니다. 이걸 어디에 쓰냐면, 건축이나 건물, 다리 놓는데도 들어가지만, 저희들은 경량, 가벼운 I-빔을 취급하는데요, 주로 부자재, 그러니까 다리 놓는데 들어가는 데가 아니고, 부자재로 가장 많이 판매하는 분야가 미국의 모빌홈인데요, 그 밑에 철재가 많이 들어갑니다.

백 회장의 이력서를 보니까, 1956년에 미국에 단신으로 유학 왔던데요, 미국생활 얼추 50년이 넘었네요? 그동안 살면서 겪은 미국이라는 나라, 어떻습니까?

백영중: 제 일생은 일제시대 15년, 북한공산당치하 5년, 남한에 와서 5년. 미국에 와서 50여년, 참 미국이 훌륭한 나라입니다. 저같이 방황하던 고아 같은 사람, 북한에서 내려와서 남한에서 밤장사하면서 헤매다가 이럭저럭 수단 좋게 거짓말하면서 살다가, 미국에 왔죠. 영어 한 단어도 모르고 돈 한 푼도 없이 와서 여기서 대학도 다 졸업하고, 심지어 지금은 명예박사지만, 박사학위까지 받고요. 정말 특별히 수재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미국에서는 평범하게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다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저는 믿습니다.

한국 전쟁 때 남쪽으로 내려간 백회장은 이산가족이시겠군요?

백영중: 네 맞습니다. 저희 가정은 한국 전쟁 때 많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제 일생동안, 제가 모든 것을 제 생각했던 대로 이루었는데, 제가 한 가지 이루지 못하고 한스럽게 생각하는 한이 우리 동생입니다. 우리 동생이 원래 나하고 같이 도망을 나왔었는데요, 제가 그때 동생더러 "너는 돌아가서 어머니와 아이들을 도와서 숨어 있어라" 하고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 돼버렸습니다.

나는 미국까지 와서 왕같이 살았지만, 우리 동생은 그 후에 감옥으로 가서 거기서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그 동생을 찾느라고 여태까지 50년 동안을 하루도 잊어먹지 않고 기도하고 찾았는데, 금년 초에 우리 동생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정식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이.... (울음을 참음) 솔직히 저는 북한이야기라면 신물이 날정도로 싫어합니다.

충격이 크셨겠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살아 계신가요?

백영중: 2000년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지난 1995년에 미국 경제사절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적에 지금은 망명한 황장엽씨의 주선으로 우리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우리 어머니를 초대소에 초대해서 나흘 동안같이 자고, 같이 목욕해드리고, 같이 쇼핑도 가서 옷도 사드리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요, 세 아들이 다 죽은 것으로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맏아들인 제가 가서 나흘 동안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제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흘 동안 모셨으니까 그 한은 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95년이면, 북한과 미국이 제네바 합의 조치를 취한 이후인데요, 황장엽씨는 그 후 2년 뒤에 한국으로 망명하지 않았습니까?

백영중: 네. 맞습니다. 그 황장엽씨네 가족들은 참 훌륭한 사람이요. 주체사상을 그 분이 다 맡아서 썼는데, 제가 갔었을 때 그 주체사상을 다시 고쳐 쓴다, 그러니까 그 내용을 한번 읽어주고 코멘트를 해달라는 조금 이상한 부탁을 북한에서 했었던 게 기억납니다. 또 북한에서는 김일성이가 자기 자신이 회고록을 썼다고 하는데, 그 회고록 쓴 것을 도와준 사람이 황장엽입니다. 황장엽씨가 도산 안창호 선생을 김일성 회고록에 썼는데요, 손종도 목사때문이었습니다.

손 목사는 김구선생과 가깝고, 도산 안창호선생과 제일 가까운 친구인데, 김일성도 역시 그 손목사더러 자기 아버지, 나아가 '대신 아버지'라고까지 했었답니다. 도산 안창호가 그렇게 그 사람(손목사)과 가까이 지낸 것을 쓰려고 하다보니까 그 재료가 더 필요했던지, 황장엽씨가 그걸 쓰느라 노력했던지, 북한에 제가 갔을 적에 "도산 안창호책을 좀 구해 달라"해서 제가 남한에 내려온 후 그 책을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그가 남한으로 내려온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었습니다.

방북 일화가 있다면 하나 소개해주시죠.

백영중: 사실은 그 아들이... 좀 이상하게 그때 황장엽씨가 자기가족을 소개해주어서 그의 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요, 황장엽씨 아들과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황경모가) 생기기도 아주 잘생기고, 김일성대학에서 석사학위도 받은 친구입니다. 영어도 잘했어요. 옆에 있던 사람이 '영어로 한번 해봐라' 그래서 영어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시험도 해봤었죠. 제 맘에 들었던 게, 그 사람은 북한 옷을 입는 게 아니고, 영국서 만든 폴로 티셔츠를 입고서 아주 점잖게 굴었어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저 사람은 공산당이지만, 마음에 꼭 든다'. 사실은 그 사람을 미국에 데려와서 공부시킬까 생각했었는데, 세상이, 인생이 다 바꿔져버렸죠. 그 이는 지금 북한에 남아서 거의 병신이 되고, 황장엽씨 부인은 자살하고, 그의 딸도 죽고해서 황장엽씨네 가족은 지금 말이 아닙니다.

백 회장의 자서전,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전쟁의 폐허위에서 연줄도 돈도 없는 무력한 한 청년이 겪어야 하는 남한생활이라는 것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월남한 사람들은 귀찮은 존재로 취급받기 일쑤였다. 이북말투를 쓴다 싶으면 경계하는 분위기였다." 제가 이걸 읽으면서, 최근 탈북자들이 남한생활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과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탈북자들에게 먼저 월남했던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백영중: 정말 세계화시대, 전 세계가 국경이 없는 세대에, 북한에서는 정말 단군이래, 제일 심한 혹독한 체제하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친척끼리도 왔다갔다 못하는 폐쇄사회에서 살다가 자유세계에 오면 반드시 허황하고 불평도 생기겠죠. 역시 그 과정은 지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북한의 제도가 나빴다는 것을 후회하면서, 될 수 있으면 빨리 남한이나 또는 다른 자유세계에 적응해서 자유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또 자기 자신이 살아남는 모양으로 바뀌어야지 누가 해주는 것, 누가 도와주는 것만 바라보고 살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 역시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절실히 느낍니다.

워싱턴-장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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